목공샘의 잡테리어

지속가능한 지구살이를 위해 재활용/친환경/ DIY 공부 중

독서일기/필사 49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4

무거운 흙 계수님께 나는 그날 이곳의 흙 한줌을 가지고 가서 새 교도소의 땅에 묻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으로 얼룩진 흙 한 줌을 떼어들자 역사의 한 조각을 손에 든 양 천 근의 무게가 잠자는 나의 팔을 타고 뛰어들어 심장의 전율로 맥박칩니다. 나는 이 살아서 숨쉬는 흙 한 줌을 나의 가슴에 묻듯이 새 교도소의 땅에 묻고 돌아왔습니다. 불더위와 물소나기가 그리도 팽팽히 싸웠쌓더니, 끝내 더위가 한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긴 것은 물이 아니라 세월이었다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추위가 닥치기까지의 짧은 가을을 앞에 놓고, 나는 더위에 힘부쳐 헝클어진 생각을 잘 꾸려서 그런대로의 마무리를 해두고 싶습니다. 독다산 유감 아버님께 생사별리 등 갖가지 인간적 고초로 가득 찬 18년에 걸친 유형의 세월..

독서일기/필사 2018.04.18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3

죄명과 형기 계수님께 죄명은 그 사람의 '질'을, 형기는 그 질의 '정도'를 상징합니다. '관계'는 '관점'을 결정합니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경우에는 이 바라본다는 행위는 그를 알려는 태도가 못됩니다.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 과거에 투영된 현재 부모님께 역사현상은 그것이 개인이든 사건이든, 하나의 단절된 객체로 한정할 수 없으며, 그것에 선행하는 여러 가지의 계기에서부터 그것의 발전, 변용의 가능한 방향에 긍하는 총합과정의 한 부문으로서 파악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더욱이 '과거'란 완성되고 끝마쳐진 어떤 불변의 것이 아니며, 반..

독서일기/필사 2018.04.17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2

꿈에 뵈는 어머님 어머님께 올봄도 계절을 정직하게 사는 꽃들이 늦추위에 떠는 해가 되려나 봅니다. -정직하게 세상을 살아온 양심수들의 징역살이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됨 기다림은 더 많은 것을 견디게 하고 더 먼 것을 보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을 갖게 합니다. 어머님께도 기대림이 집념이 되어 어머님의 정신과 건강을 강하게 지탱해주기시 바랍니다. 함께 맞는 비(전문) 형수님께 상처가 아물고 난 다음에 받은 약은 상처를 치료하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늦고, 도리어 그 아프던 기억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시기가 엇갈려 일어난 실패의 사고한 예에 불과하지만, 남을 돕고 도움을 받는 일이 경우에 따라서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더 큰 것을 해치는 일이 됩니다. 함께 ..

독서일기/필사 2018.04.16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1

갈근탕과 춘향가 아버님께 젊은이들은 환풍호우하는 사명대사의 도술이 사라져버리자 조금은 서운한 눈치입니다만 사명당에 얽힌 갖가지 도술과 일화들은, 한 시대의 복판을 사심없이 앞장서 간 위인에게 민중들이 바치는 애정의 헌사라는 점에서 도리어 '민중적 진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순전히 풀뿌리와 열매와 나무껍질로 된 천연생약이라 글로써 읽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느낌이 듭니다. 광고의 홍수와 더불어 쏟아져나온 수많은 합성약품으로 할퀴어진 심신에 상쾌한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같습니다. 외국어의 구문화 표현으로 이도저도 아닌 국적 불명의 문장이 되어버린 오늘의 글을 합성약품에 비긴다면 옛되고 무구한 우리 고유의 글월이 본래의 자태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 전주 목판의 슈졀가는 그 훈훈하기가 바로 ..

독서일기/필사 2018.04.14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0

가을의 사색(전문) 형수님께 해마다 가을이 되면 우리들은 추수라도 하듯이 한 해 동안 키워온 생각들을 거두어봅니다. 금년 가을도 여느 해나 다름없이 손에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공허한 마음은 뼈만 데리고 돌아온 '바다의 노인' 같습니다. 봄, 여름, 가을, 언제 한번 온몸으로 떠맡은 일 없이 그저 앉아서 생각만 달리는 일이 부질없기가 얼음 쪼아 구슬 만드는 격입니다. 그나마 내 쪽에서 벼리를 잡고 엮어간 일관된 사색이 아니라 그때 그때 부딪쳐오는 잡념잡사의 범위를 넘지 못하는 연습 같은 것들이고 보면 빈약한 추수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위에 정직한 최선을 다하지 못한 후회까지 더한다면 이제 문 닫고 앉아 봄을 기다려야 할 겨울이 더 길고 추운 계절로만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숱한 가을을 보내고..

독서일기/필사 2018.04.13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9

황소(전문) 형수님께 얼마 전에 매우 크고 건장한 황소 한 마리가 수레에 잔뜩 짐을 싣고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이 '끝동네'의 사람들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관심으로 공장 앞이나 창문에 붙어서 열심히 바라보았습니다. 더운 코를 불면서 부지런히 걸어오는 황소가 우리에게 맨 먼저 안겨준 감동은 한마디로 우람한 '역동'이었습니다. 꿈틀거리는 힘살과 묵중한 발걸음이 만드는 원시적 생명력은 분명 타이탄이나 8톤 덤프나 '위대한 탄생'에는 없는 '위대함'이었습니다. 야위 마음에는 황소 한 마리의 활기를 보듬기에 버거워 가슴 벅찹니다. 그러나 황소가 일단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자 이제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우람한 역동 뒤의 어디메에 그런 엄청난 한이 숨어 ..

독서일기/필사 2018.04.11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8

바다에서 파도를 만나듯 아버님께 "고요히 앉아 아무 일 않아도 봄은 오고 풀잎은 저절로 자란다"는 선승의 유유자적한 달관도 없지 않습니다만, 저만치 뜨거운 염천 아래 많은 사람들의 수고로운 일터를 두고도 창백한 손으로 한갖되이 방안에 앉아 있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징역의 소치라 하더라도 결국 거대한 소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새의 울음소리가 그 이전의 정적 없이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저는 이 범상히 넘길 수 없는 소외의 시절을, 오거서의 지식이나, 이미 문제에서 화제의 차원으로 떨어진 철늦은 경험들의 취집에 머물지 않고, 이러한 것들을 싸안고 훌쩍 뛰어넘는 이른바 '전인적 체득'과 '양묵'에 마음 바치고 싶습니다. 팽이가 가장 꼿꼿이 선 때를 일컬어 졸고 있다고 하며, 시낵물이 담을 이루어 멎을 때..

독서일기/필사 2018.04.10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7

창문과 문 형수님께 이번 이사 때 가장 두고 오기 아까웠던 것은 '창문'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능선과 오뉴월 보리밭 언덕이 내다보이는 창은 우리들의 메마른 시선을 적셔주는 맑은 샘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창문'보다는 역시 '문'이 더 낫습니다.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힘찬 실천의 현장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 앞에 조용히 서서 먼 곳에 착목하여 스스로의 생각을 여미는 창문이 귀중한 '명상의 양지'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결연히 문을 열고 온몸이 나아가는 진보 그 자체와는 구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둠이 일깨우는 소리 계수님께 어둠은 새로운 소리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놀랍게도 나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어둠은 나 자신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캐어물..

독서일기/필사 2018.04.09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6

고난의 바닥에 한 톨 인정의 씨앗 아버님께 겨울 동안은 서로의 체온이 옆사람을 도와 혹한을 견디던 저희들이 이제 여름에는 자기의 체온으로 옆사람을 불 때는 형국이 되어 물것들의 등살에 더하여 당찮은 미움까지 만들어내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저께 밤중의 일이었습니다. 여태 없던 서늘한 바람기에 눈을 떴더니, 더위에 지친 동료를 위하여 방 가운데서 부채질하고 서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엄상은 정목을 가려내고 설중에 매화 있듯이 고난도 그 바닥에 한 톨 인정의 씨앗을 묻고 있는가 봅니다. 이러한 인정을 보지 못하고 지레 '미움'을 걱정함은 인간의 신성의 깊음에 대한 스스로의 단견외에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청의삭발승 형수님께 옛날에 수염이 길고 지혜 또한 깊은 어느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짙게..

독서일기/필사 2018.04.07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5

불꽃 계수님께 나한테 묻는다면 겨울의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불빛이라고 하겠습니다. 새까만 연탄구멍 저쪽의 아득한 곳에서부터 초롱초롱 눈을 뜨고 세차게 살아오르는 주홍의 불빛은 가히 겨울의 꽃이고 심동의 평화입니다. 천 년도 더 묵은, 검은 침묵을 깨뜨리고 서슬 푸른 불꽃을 펄럭이며 뜨겁게 불타오르는 한겨울의 연탄불은, 추위에 곧은 손을 불러모으고,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젖은 양말을 말리고... 그리고 이따금 겨울 창문을 열게 합니다. 봄싹 형수님께 15척 담은 봄도 넘기 어려운지 봄은 밖에 먼저 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나절의 봄나들이를 맞아 저마다 잠자던 감성의 눈을 크게 뜨고 봄을 들이마시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는 들판을 기웃거리다가 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을 놀라움으로 깨달았다. 사람에게 봄기..

독서일기/필사 2018.04.06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