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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전문)
형수님께
얼마 전에 매우 크고 건장한 황소 한 마리가 수레에 잔뜩 짐을 싣고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이 '끝동네'의 사람들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관심으로 공장 앞이나 창문에 붙어서 열심히 바라보았습니다.
더운 코를 불면서 부지런히 걸어오는 황소가 우리에게 맨 먼저 안겨준 감동은 한마디로 우람한 '역동'이었습니다. 꿈틀거리는 힘살과 묵중한 발걸음이 만드는 원시적 생명력은 분명 타이탄이나 8톤 덤프나 '위대한 탄생'에는 없는 '위대함'이었습니다. 야위 마음에는 황소 한 마리의 활기를 보듬기에 버거워 가슴 벅찹니다.
그러나 황소가 일단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자 이제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우람한 역동 뒤의 어디메에 그런 엄청난 한이 숨어 있었던가.물기어린 눈빛, 굵어서 더욱 처연한 두 개의 뿔은, 먼저의 우렁차고 건강한 감동을 밀어내고 순식간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잔잔한 슬픔의 앙금을 채워놓습니다.
황소가 싣고 온 것이 작업재료가 아니라 고향의 산천이었던가. 저마다의 표정에는 "고향 떠난 지도 참 오래지?" 하는 그리움의 표정이 역력하였습니다. 이 '끝동네'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각박한 도시를 헤메던 방황의 역사를 간직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황소를 보는 마음은 고향을 보는 마음이며, 동시에 자신의 스산한 과거를 돌이켜보는 마음이어서 황소가 떠나고 난 빈자리를 그저는 뜨지 못해 하였습니다.
황소는 제가 싣고 온 짐보다 더 큰 것을 우리들의 가슴에 부려놓고 갔음에 틀림없습니다.
편지 못 읽을 우용이, 주용이에게는 황소 그림을 보냅니다. 서울의 어린이들에게 황소란 달나라의 동물만큼이나 아득한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더욱 바쁘실 형님, 형수님 건강을 빕니다. 깊은 밤에는 별이, 더운 여름에는 바람을 거느린 소나기가 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의 위안입니다.
저마다의 진실(전문)
계수님께
각각 다른 골목을 살아서 각각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한 방에서 혼거하게 되면 대화는 흔히 심한 우김질로 나타납니다.
귀신이 있다 없다, 소방차가 사람을 치어도 죄가 안된다 된다던 국민학교 때의 숙제를 닮은 것에서부터, 서울역 대합실 천장의 부조가 무궁화다, 사꾸라꽃이다라는 기상천외의 것에 이르기까지 그 제재의 다채로움과 그 목소리의 과열함은 스산한 감방에 사람 사는 듯한 활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나는 이를 시끄럽다 여기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경험적 사실을 곧 보편적 진리로 믿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는 오히려 그 정수의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신의와 주체성의 일면을 발견합니다.
섬 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며, 산골 사람에게 해는 산봉우리에서 떠서 산봉우리로 지며, 서울 사람에게 있어서 해는 빌딩에서 떠서 빌딩으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 사람이 산골 사람을, 서울 사람이 섬 사람을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지구의 자전을 하는 사람은 이 우김질을 어리석다 깔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바다나 산이나 그런 구체적인 경험의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뜨는 해를 볼 수 있는가? 물론 없습니다. 있다면 그곳은 머리 속일 뿐입니다.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이며 순수한 의미의 관찰, 즉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가치중립적인 관찰이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탤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은 혹서와 가뭄은 동생이 가 있는 사우디의 기후를 실감케 합니다.
일어나 앉은 두용이 우뚝우뚝, 녹슬지 않은 계수님 반짝반짝, 모두 반가운 소식입니다.
우김질(전문)
계수님께
지난번에는 교도소의 '우김질'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만, 그 우김질도 찬찬히 관찰해보면 자기 주장을 우기는 방법도 가지각색인데, 대개 다음의 대여섯 범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작정 큰소리 하나로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방법입니다. 목에 핏대를 세우는 고함 때문에 다른 사람의 반론이 묻혀버리는 이른바 '입만 있고 귀는 없는' 우격다짐입니다.
둘째는, 그 주장에 날카로운 신경질이 가득 담겨 있어서 자칫 싸움이 될까봐 말상대를 꺼리기 때문에 제대로의 시비나 쟁점에의 접근이 기피됨으로써 일견 부전승의 외형을 띠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최고급의 형용사, 푸짐한 양사, 과장과 다변으로 자기 주장의 거죽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방법인데, 이것은 가히 물량시대와 상업광고의 아류라 할 만합니다.
넷째는, 누구누구가 그렇게 말했다는 둥, 무슨 책에 그렇게 씌어 있다는 등... 자체의 조리나 이론적 귀결로써 자기 주장을 입증하려 하지 않고 유명인, 특히 외국의 것에 편승, 기술제휴(?)함으로써 '촌놈 겁주려는' 매판적 방법입니다.
다섯째는, a1+a2+....+an 등으로 자기 주장에 +가 되는 요인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a'의 방법입니다. 결국 -요인에 대한 +요인의 우세로써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방법인데 이는 소위 '헤겔'의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필연성의 일종이긴 하나 필연성 그 자체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자연과학에 흔히 나타나는 기계적 사고의 전형입니다.
여섯째는, (자기의 주장을 편의상 '그것'이라고 한다면) 우선 '그것'과의 반대물을 대비하고, 전체 속에서의 '그것'의 위치를 밝힘으로써 그것의 객관적 의의를 규정하며,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시계열상의 변화, 발전의 형태를 제시하는 등의 방법인데 이것은 한마디로 다른 것들과의 관계와 상호연관 속에서 '그것'을 동태적으로 규정하는 방법입니다.
이들 가운데서 여섯번째의 방법이 가장 지성적인 것임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여섯번째의 방법이 난삽한 논리와 경직된 개념으로 표현되지 않고 생활 주변의 일상적인 사례와 서민적인 언어로 나타나는 소위 예술적 형상화가 이루어진 상태를 가히 최고의 형태로 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깨닫도록 은밀히 도와주고 끈기 있게 기다려주는 유연함과 후덕함을 갖추는 일입니다. 이런 경우는 주장과 주장의 대립이 논쟁의 형식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잘 아는 친구가 서로 만나서 친구 따라 함께 강남 가듯, 춘풍대아한 감화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군자성인지미, 군자는 타인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며, 상선약수, 최고의 선은 순조롭기가 흡사 물과 같다는 까닭도 아마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비슷한 얼굴
계수님께
한 그루의 나무가 되라고 한다면 나는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 속에 서고 싶습니다. 한 알의 물방울이 되라고 한다면 저는 단연 바다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지막한 동네에서 비슷한 말투, 비슷한 욕심,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싶습니다.
감옥은 교실
형수님께
육순 노인에서 스물두어 살 젊은이에 이르는 스무남은 명의 식구(?)가 한 방에서 숨길 것도 내세울 것도 없이 바짝 몸 비비며 살아가는 징역살이는 사회, 역사 의식을 배우는 훌륭한 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도덕적 분식이나 의례적인 옷을 훨훨 벗어버리고 벌거숭이의 이, 해, 호, 오가 알몸 그대로 표출됩니다. 알몸은 가장 정직한 모습이며, 정직한 모습은 공부하기에 가장 쉽습니다.
오늘 필사한 내용은 '전문' 필사가 많다. 아마도 선생님의 사색이 깊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져 그런게 아닌가 싶다.(선생님을 평가하는 듯해서 면구스럽지만) 그리고, 형수님, 계수님께 쓰는 글이 더 많다. 아무래도 부모님보다는 더 편하고 스스럼이 없어 자연스럽게 글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자연스러우니 읽기에 (필사하기에) 더 좋은 게 아닌가 하는.
징역살이에서 경험한 '욕설', '우김질' 등을 해석하시는 품이 정겹다. '인탤리의 안경'이라고 자기자신을 평가하는 대목에서는 겸허한 선생님의 모습을 본다. 자신의 지식과 배움보다 '다른 골목'에서 살아 온 맨주먹 뿐인 불량배(?)들의 치기와 무식을 더 건강하게 보신다. 위대한 사상가의 위대한 인간성, 누구보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이유다. 하루하루 더 사셨으면 인류의 정신이 하루하루 더 성숙했을텐데... 선생님의 소천이 참 아쉽다.
형수님께
얼마 전에 매우 크고 건장한 황소 한 마리가 수레에 잔뜩 짐을 싣고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이 '끝동네'의 사람들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관심으로 공장 앞이나 창문에 붙어서 열심히 바라보았습니다.
더운 코를 불면서 부지런히 걸어오는 황소가 우리에게 맨 먼저 안겨준 감동은 한마디로 우람한 '역동'이었습니다. 꿈틀거리는 힘살과 묵중한 발걸음이 만드는 원시적 생명력은 분명 타이탄이나 8톤 덤프나 '위대한 탄생'에는 없는 '위대함'이었습니다. 야위 마음에는 황소 한 마리의 활기를 보듬기에 버거워 가슴 벅찹니다.
그러나 황소가 일단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자 이제는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 우람한 역동 뒤의 어디메에 그런 엄청난 한이 숨어 있었던가.물기어린 눈빛, 굵어서 더욱 처연한 두 개의 뿔은, 먼저의 우렁차고 건강한 감동을 밀어내고 순식간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잔잔한 슬픔의 앙금을 채워놓습니다.
황소가 싣고 온 것이 작업재료가 아니라 고향의 산천이었던가. 저마다의 표정에는 "고향 떠난 지도 참 오래지?" 하는 그리움의 표정이 역력하였습니다. 이 '끝동네'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각박한 도시를 헤메던 방황의 역사를 간직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황소를 보는 마음은 고향을 보는 마음이며, 동시에 자신의 스산한 과거를 돌이켜보는 마음이어서 황소가 떠나고 난 빈자리를 그저는 뜨지 못해 하였습니다.
황소는 제가 싣고 온 짐보다 더 큰 것을 우리들의 가슴에 부려놓고 갔음에 틀림없습니다.
편지 못 읽을 우용이, 주용이에게는 황소 그림을 보냅니다. 서울의 어린이들에게 황소란 달나라의 동물만큼이나 아득한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더욱 바쁘실 형님, 형수님 건강을 빕니다. 깊은 밤에는 별이, 더운 여름에는 바람을 거느린 소나기가 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의 위안입니다.
저마다의 진실(전문)
계수님께
각각 다른 골목을 살아서 각각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한 방에서 혼거하게 되면 대화는 흔히 심한 우김질로 나타납니다.
귀신이 있다 없다, 소방차가 사람을 치어도 죄가 안된다 된다던 국민학교 때의 숙제를 닮은 것에서부터, 서울역 대합실 천장의 부조가 무궁화다, 사꾸라꽃이다라는 기상천외의 것에 이르기까지 그 제재의 다채로움과 그 목소리의 과열함은 스산한 감방에 사람 사는 듯한 활기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나는 이를 시끄럽다 여기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경험적 사실을 곧 보편적 진리로 믿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는 오히려 그 정수의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신의와 주체성의 일면을 발견합니다.
섬 사람에게 해는 바다에서 떠서 바다로 지며, 산골 사람에게 해는 산봉우리에서 떠서 산봉우리로 지며, 서울 사람에게 있어서 해는 빌딩에서 떠서 빌딩으로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섬 사람이 산골 사람을, 서울 사람이 섬 사람을 설득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 됩니다.
지구의 자전을 하는 사람은 이 우김질을 어리석다 깔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렇다면 바다나 산이나 그런 구체적인 경험의 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뜨는 해를 볼 수 있는가? 물론 없습니다. 있다면 그곳은 머리 속일 뿐입니다. '우주는 참여하는 우주'이며 순수한 의미의 관찰, 즉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가치중립적인 관찰이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탤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추론적 지식과 직관적 예지가 사물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것이라면, 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은 혹서와 가뭄은 동생이 가 있는 사우디의 기후를 실감케 합니다.
일어나 앉은 두용이 우뚝우뚝, 녹슬지 않은 계수님 반짝반짝, 모두 반가운 소식입니다.
우김질(전문)
계수님께
지난번에는 교도소의 '우김질'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만, 그 우김질도 찬찬히 관찰해보면 자기 주장을 우기는 방법도 가지각색인데, 대개 다음의 대여섯 범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작정 큰소리 하나로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방법입니다. 목에 핏대를 세우는 고함 때문에 다른 사람의 반론이 묻혀버리는 이른바 '입만 있고 귀는 없는' 우격다짐입니다.
둘째는, 그 주장에 날카로운 신경질이 가득 담겨 있어서 자칫 싸움이 될까봐 말상대를 꺼리기 때문에 제대로의 시비나 쟁점에의 접근이 기피됨으로써 일견 부전승의 외형을 띠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최고급의 형용사, 푸짐한 양사, 과장과 다변으로 자기 주장의 거죽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방법인데, 이것은 가히 물량시대와 상업광고의 아류라 할 만합니다.
넷째는, 누구누구가 그렇게 말했다는 둥, 무슨 책에 그렇게 씌어 있다는 등... 자체의 조리나 이론적 귀결로써 자기 주장을 입증하려 하지 않고 유명인, 특히 외국의 것에 편승, 기술제휴(?)함으로써 '촌놈 겁주려는' 매판적 방법입니다.
다섯째는, a1+a2+....+an 등으로 자기 주장에 +가 되는 요인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a'의 방법입니다. 결국 -요인에 대한 +요인의 우세로써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방법인데 이는 소위 '헤겔'의 '실재적 가능성'으로서 필연성의 일종이긴 하나 필연성 그 자체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자연과학에 흔히 나타나는 기계적 사고의 전형입니다.
여섯째는, (자기의 주장을 편의상 '그것'이라고 한다면) 우선 '그것'과의 반대물을 대비하고, 전체 속에서의 '그것'의 위치를 밝힘으로써 그것의 객관적 의의를 규정하며,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시계열상의 변화, 발전의 형태를 제시하는 등의 방법인데 이것은 한마디로 다른 것들과의 관계와 상호연관 속에서 '그것'을 동태적으로 규정하는 방법입니다.
이들 가운데서 여섯번째의 방법이 가장 지성적인 것임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여섯번째의 방법이 난삽한 논리와 경직된 개념으로 표현되지 않고 생활 주변의 일상적인 사례와 서민적인 언어로 나타나는 소위 예술적 형상화가 이루어진 상태를 가히 최고의 형태로 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깨닫도록 은밀히 도와주고 끈기 있게 기다려주는 유연함과 후덕함을 갖추는 일입니다. 이런 경우는 주장과 주장의 대립이 논쟁의 형식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잘 아는 친구가 서로 만나서 친구 따라 함께 강남 가듯, 춘풍대아한 감화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군자성인지미, 군자는 타인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며, 상선약수, 최고의 선은 순조롭기가 흡사 물과 같다는 까닭도 아마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비슷한 얼굴
계수님께
한 그루의 나무가 되라고 한다면 나는 산봉우리의 낙락장송보다 수많은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 속에 서고 싶습니다. 한 알의 물방울이 되라고 한다면 저는 단연 바다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지막한 동네에서 비슷한 말투, 비슷한 욕심, 비슷한 얼굴을 가지고 싶습니다.
감옥은 교실
형수님께
육순 노인에서 스물두어 살 젊은이에 이르는 스무남은 명의 식구(?)가 한 방에서 숨길 것도 내세울 것도 없이 바짝 몸 비비며 살아가는 징역살이는 사회, 역사 의식을 배우는 훌륭한 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도덕적 분식이나 의례적인 옷을 훨훨 벗어버리고 벌거숭이의 이, 해, 호, 오가 알몸 그대로 표출됩니다. 알몸은 가장 정직한 모습이며, 정직한 모습은 공부하기에 가장 쉽습니다.
오늘 필사한 내용은 '전문' 필사가 많다. 아마도 선생님의 사색이 깊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넓어져 그런게 아닌가 싶다.(선생님을 평가하는 듯해서 면구스럽지만) 그리고, 형수님, 계수님께 쓰는 글이 더 많다. 아무래도 부모님보다는 더 편하고 스스럼이 없어 자연스럽게 글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자연스러우니 읽기에 (필사하기에) 더 좋은 게 아닌가 하는.
징역살이에서 경험한 '욕설', '우김질' 등을 해석하시는 품이 정겹다. '인탤리의 안경'이라고 자기자신을 평가하는 대목에서는 겸허한 선생님의 모습을 본다. 자신의 지식과 배움보다 '다른 골목'에서 살아 온 맨주먹 뿐인 불량배(?)들의 치기와 무식을 더 건강하게 보신다. 위대한 사상가의 위대한 인간성, 누구보다 선생님을 좋아하는 이유다. 하루하루 더 사셨으면 인류의 정신이 하루하루 더 성숙했을텐데... 선생님의 소천이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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