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지속가능한 지구살이를 위해 재활용/친환경/ DIY 공부 중

독서일기 53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6

고난의 바닥에 한 톨 인정의 씨앗 아버님께 겨울 동안은 서로의 체온이 옆사람을 도와 혹한을 견디던 저희들이 이제 여름에는 자기의 체온으로 옆사람을 불 때는 형국이 되어 물것들의 등살에 더하여 당찮은 미움까지 만들어내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저께 밤중의 일이었습니다. 여태 없던 서늘한 바람기에 눈을 떴더니, 더위에 지친 동료를 위하여 방 가운데서 부채질하고 서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엄상은 정목을 가려내고 설중에 매화 있듯이 고난도 그 바닥에 한 톨 인정의 씨앗을 묻고 있는가 봅니다. 이러한 인정을 보지 못하고 지레 '미움'을 걱정함은 인간의 신성의 깊음에 대한 스스로의 단견외에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청의삭발승 형수님께 옛날에 수염이 길고 지혜 또한 깊은 어느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짙게..

독서일기/필사 2018.04.07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5

불꽃 계수님께 나한테 묻는다면 겨울의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불빛이라고 하겠습니다. 새까만 연탄구멍 저쪽의 아득한 곳에서부터 초롱초롱 눈을 뜨고 세차게 살아오르는 주홍의 불빛은 가히 겨울의 꽃이고 심동의 평화입니다. 천 년도 더 묵은, 검은 침묵을 깨뜨리고 서슬 푸른 불꽃을 펄럭이며 뜨겁게 불타오르는 한겨울의 연탄불은, 추위에 곧은 손을 불러모으고,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젖은 양말을 말리고... 그리고 이따금 겨울 창문을 열게 합니다. 봄싹 형수님께 15척 담은 봄도 넘기 어려운지 봄은 밖에 먼저 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나절의 봄나들이를 맞아 저마다 잠자던 감성의 눈을 크게 뜨고 봄을 들이마시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는 들판을 기웃거리다가 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을 놀라움으로 깨달았다. 사람에게 봄기..

독서일기/필사 2018.04.06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4

세월의 아픈 채찍 계수님께 기상시간 전에 옆사람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뽑아 벽 기대어 앉으면 싸늘한 벽의 냉기가 나를 깨우기 시작합니다. 나에게는 이때가 하루의 가장 맑은 시간입니다. 겪은 일, 읽은 글, 만난 인정, 들은 사정.... 밤의 긴 터널 속에서 여과된 어제의 역사들이 내 생각의 서가에 가지런히 정돈되는 시간입니다. 침묵과 요설 계수님께 교도소의 문화는 우선 침묵의 문화입니다. 마음을 열지 않고, 과거를 열지 않고, 그리고 입마저 열지 않는, 침묵과 외부와의 거대한 벽이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쓸쓸히 차단하고 있습니다. 두드려도 응답없는 침통한 침묵이 15척 높은 울이 되어 그런대로 최소한의 자기를 간수해가고 있습니다. 교도소의 문화는 또한 요설의 문화입니다. 요설은 청중을 미아로 만드는 ..

독서일기/필사 2018.04.03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3

신발 한 켤레의 토지에 서서 계수님께 사과장수는 사과나무가 아니면서 사과를 팔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정직한 말을 파는 세로에서, 발파멱월, 강물을 헤쳐서 달을 찾고, 우산을 먼저 보고 비를 나중 보는 어리석음이 부끄러워지는 계절-남들의 세상에 세들어 살듯 낮게 살아온 사람들 틈바구니 신발 한 켤레의 토지에 서서 가을이면 먼저 어리석은 지혜의 껍질들을 낙엽처럼 떨고 싶습니다. 낮은 곳 형수님께 '푸른 과실이 햇빛을 마시고 제 속의 쓰고 신 물을 달고 향기로운 즙으로 만들 듯이' 저도 이 가을에는 하루하루의 아픈 경험들을 양지바른 생각의 지붕에 널어, 소중한 겨울의 양식으로 갈무리하려고 합니다. -'양지바른 생각의 지붕' 이 말은 '성찰'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겠지. 나에게도 그런 생각의 지붕이 있었으..

독서일기/필사 2018.04.02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2

창살 너머 하늘 형수님께 창살 때문에 더 먼 하늘에는 크고 흰 구름이 일요일의 구름답게 바쁠 것 하나 없이 쉬고 있습니다. 흙내(전문) 계수님께 15척 옥담으로 둘린 교도소의 땅은 흔히들 좌절과 고뇌로 얼룩져서 화분에 담긴 흙처럼 흙내가 없다고 합니다. 이번 여름 패연히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다가 문득 창문 가득히 물씬 풍기는 흙내에 깜짝 놀랐습니다. 2층에서 보는 빗줄기는 더욱 세차고 길어서 장대같이 땅에 박혀 있었고 창문 가득한 흙내는 그 장대 빗줄기를 타고 오르는-맑은 날 뭉게구름이 되려고 솟아오른 흙내였습니다. 지심의 깊음에 비하면 얼룩진 땅 한 켜야 종이 한 장 두께도 못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뱀을 죽이면 반드시 나무에 걸어두었습니다. 흙내를 맡으면 다시 살아나서 밤중에 이불 속으로 찾아온다..

독서일기/필사 2018.04.01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1

눈 오는 날 형수님께 눈이 오는 날은 눈사람처럼 속까지 깨끗하게 되고 싶다던 '무구한 가슴'이 생각납니다. 모든 추함 까지도 은신시키는 기만의 백색에 둘리지 말자던 '냉철한 머리'가 아울러 생각납니다. 그러나 눈이 오는 날은 역시 후에 치러야 할 긴 한고에도 불구하고 우선은 상당한 감정의 상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도 아버님께 '아름다움'이란 바깥 형식에 의해서라기보다 속 내용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규정되는 법임을 확인하는 심정입니다. 서도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자획의 모양보다는 자구에 담긴 뜻이 좋아야 함은 물론 특히 그 '사람'이 훌륭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작품과 인간이 강하게 연대되고 있는 서도가, 단지 작품만으로 평가되는 인간 부재의 다른 분야보다 마음에 듭니다...

독서일기/필사 2018.03.31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0

방안으로 날아든 민들레씨 아버님께 작년 이맘때의 생일연이 어제 일같이 가깝게 기억되는데 그것이 벌써 일년이나 전의 일이고 보면 저희들은 세월의 흐름에 어지간히 무디어진 것 같습니다. 1, 2년쯤 아무 하는 일 없이 지내기를 예사로 여기는 둔감함은 설령 징역살이에 필요한 감각이라 할지라도 좋은 습벽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버릇은, 특별히 절실한 일에 쫓기지 않는 데다 또 생활이 단조로워서 다양한 경험을 가질 수 없음에 연유하는 듯합니다.절실한 일이 없으면 응달의 풀싹처럼 자라지 못하며, 경험이 편벽되면 한쪽으로만 굴린 눈덩이처럼 기형화할 위험이 따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 살면서 성격의 굴절을 막고 구김살 없이 되가란 무척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물론, 개개인이 각자 자기 완결적인 덕성을 도야해가는 개..

독서일기/필사 2018.03.30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9

동굴의 우상 아버님께 최후의 한 잎마저 떨어버린 겨울의 수목이 그 근간만으로 뚜렷이 바람 속에 서고, 모든 형태의 소유와 의상을 벗어버린 징역살이는 마치 물신성이 척결된 논리처럼 우리의 사고를 간단명료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겨울에는 자칫하면 주변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 제 한 몸의 문제에 문 닫고 들어앉아 칩거해버릴 위험도 없지 않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소유욕이며 추락입니다. 그러므로 겨울이 돌아오면 스스로 문을 열고 북풍 속에 섬으로써만이 '동굴의 우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손님 아버님께 모든아이들에게 있어서 손님은, 어른들의 자상하지 않은 대꾸로 인하여 더욱 궁금해진 그 미지의 손님은 어린이들이 최초로 갖게 되는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며, 어린아이들의 소왕국을 온통 휘저어놓는 '걸리버'의 ..

독서일기/필사 2018.03.29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8

거두망창월 아버님께 가을이라 옥창에 걸리는 달도 밤마다 둥글게 자랍니다. 가을은 '글 읽던 밤에 달이 떠 있는 우물물을 깨뜨리고 정갈하고 시원한 냉수를 뜨며' 잠시 시름을 쉬고 싶은 계절입니다. 옥창 속의 역마 계수님께 가게에 내놓은 사과알의 색깔과 굵기로 가을의 심도를 측정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풀빛의 어린 사과가 가게의 소반 위에서 가을과 함께 커가면 사과나무가 없는 출근길에 평소 걸음이 바쁘던 도회인들도 그나마 사과 한 알만큼의 가을을 얻게 됩니다. 역마살은 떠돌이 광대넋이 들린 거라고도 하고 길신이 씌운 거라고도 하지만,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 꿈 찾아나서는 방랑이란 풀이를 나는 좋아합니다. 하늘 높이 바람 찬 연을 띄워놓으면 얼레가 쉴 수 없는 법. 안거란 기실 꿈의 상실이기 쉬우며 도..

독서일기/필사 2018.03.28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7

꽃과 나비 아버님, 어머님께 "꽃과 나비는 부모가 돌보지 않아도 저렇게 아름답게 자라지 않는냐." 어린 아들에게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졸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의 자애로 담뿍 적신 저는, 꽃보다 나비보다 더 아름답게 살아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버림과 키움 아버님께 10년, 저는 많은 것을 잃고, 또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은 서운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버린다는 것은 상추를 솎아내는, 더 큰 것을 키우는 손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두 개의 종소리(전문) 아버님께 새벽마다 저는 두 개의 종소리를 듣습니다. 새벽 4시쯤이면 어느 절에선가 범종소리가 울려오고 다시 한동안이 지나면 교회당의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 두 종소리는 서로 커다란..

독서일기/필사 2018.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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