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지속가능한 지구살이를 위해 재활용/친환경/ DIY 공부 중

독서일기/필사

[떠남과 만남-구본형] 4장-1,2

잡테리어 목공샘 2018. 3. 15. 05:47
반응형
땅끝 사자봉에서 보길도 격자봉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섬이 있다는데 나도 바닷길 따라 그 섬에 가고 싶다

상징을 빼면  인간의 정신은 빈약해진다. 땅끝의 아름다움은 여기가 반도의 끝이라는 생각 때문에 비장하고 단호한 정취를 갖게 만든다. 갈두항에서는 미처 이어지지 못한 바다 너머 다른 곳에 있는 세계로 건너가는 부두가 있다. 배는 길을 싣고 먼 바다를 건너 다음 기항지에 그 길들을 풀어놓는다. 마침내 길들은 서로 이어진다.

갈두산 사자봉은 겨우 해발 156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정도의 높이면 바닷바람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넓은 해원을 몰아쳐온 가속도로 온몸을 던져 산에 부딪친다. 이날도 예외가 없다. 사자봉은 거칠 것 없는 푸른 바람으로 가득했다.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다 서쪽에 눈이 멎었다. 섬과 바다가 이루는 수평선 근처의 모습이 그림 같다. 해는 중천에 있지만 벌써 일몰을 떠올리게 한다. 몇 시간 후에 저기 저 서쪽 바다로 해가 빠지면 참으로 아름다울 것이다.

보길도 세연정-고산 윤선도는 날씨가 좋은 때면 늘 이곳을 찾았다.-사진:윤광준

보옥리 뾰족산
-이곳을 놓치면 보길도를 보았다고 하기 어렵다

이날 나는 운이 좋았다. 보길도의 서남단에 있는 뽀족산에 올라 허리에 구름을 감고 있는 한라산을 보았다. 1년에 20일 정도만 볼 수 있다는 행운이었다. 몽롱하고 흐릿하여 더욱 신비로웠다. 산은 신기루 같아 바다 위에 떠 있는 듯 보였다. 저곳에는 신선이 살고 있구나. 어찌 그렇게 ㅅ\ㅐㅇ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4월 초 남도는 바람만 조금 비껴 불면 아주 포근하다. 걸을 때는 바람이 좋다. 아주 심하게 불어 몸을 날려 보낼 것 같은 해풍만 아니라면 간혹 적당히 불어주는 바람은 기분을 좋게 한다. 가만히 편한 바위에 앉아 있으니 황홀한 게 낙원 같다. 오후 2시의 아주 강한 햇빛이 머무는 잔잔한 물결은 바람에 실려 반짝인다. 나는 그 잔잔한 일렁임이 좋다. 푸르고 환하고 잔잔한 반짝임. 수평선 끝에 커다란 배가 지나는데 참으로 천천히 고요히 움직인다. 반면에 육지에서 바다로 나가는 작은 배는 훨씬 더 빨리 흰 물결을 만들며 커다란 소리를 질러댄다. 그러나 경박하지 않다. 고요함이 너무 커 소음은 오히려 고요함을 가중한다. 시간이 멎은 듯하다, 호흡도 멎은 듯하다. 일체의 미동도 없는 대낮, 내가 완벽히 쉬고 있는 듯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걸으며 오늘이 참 맑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년 중 이렇게 맑은 날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4월, 맑음, 한라산 허리의 구름, 반짝이는 바다, 환함, 바다 위에서 배가 만들어낸 하얀 자국, 해안에 와 닿는 바다의 한숨, 하얀 포말, 동글고 예쁜 차돌, 하염없는 태만, 시간의 정지, 할머니와 나눈 쓸쓸한 대화, 바닷바람 속에서 마신 대낮의 맥주, 아쉬운 일몰, 푸른기가 살아 있는 해진 뒤의 하늘, 섬과 산들의 실루엣, 어두워지는 시간의 추이, 그때 그 어둠의 농도, 가끔 지나가는 차의 불빛, 적당한 피곤, 어두운 길에서 차를 태워 준 작은 트럭 운전수의 친철..., 여행이 줄 수 있는 기대 요소들이 적절히 배합된 하루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