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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환 일몰
-바다가 하도 찬란해 쳐다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아주 친절한 사람이다. 태워주고 자기가 더 즐거워할 사람이다. 자기가 한 일에 즐거워하고 그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다. 실속은 하나도 없지만 실속이 뭐 그리 중요한가. 자신이 즐거운 것보다 더 훌륭한 실속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승복 어린이의 동상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글귀도 같이 있다. 이 동상을 볼 때마다 아직도 우리가 앓고 있는 사상적 질환을 떠올리고 끔찍한 심정이 된다. 늘 속이 쓰린 사람은 24시간 자기의 위만 생각하듯이 사상적 질환에 걸려 있는 정치가는 정치적 생명이 위협받을 때마다 언제나 공산당과 빨갱이 그리고 현존하는 남북의 긴장관계와 이 소년의 죽음에서 연상되는 잔인함을 걸고넘어진다. 그래서 이 소년은 죽어서도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여기에 이렇게 서 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사상적 주장을 하지 않는다. 정치적 수사도 없다. 하지만 이승복 동상에 대한 연민, 초등교육에 대한 질문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오히려 극우세력에 대해 정치적 연민도 느낀다. 바로 '사상적 질환'이라 한 대목에서.
사상이 개인을 넘어서 군림할 때 그것은 전체주의이다. 거기에 자유로운 개인은 없다. 같은 논리로 경제적 질환에 걸려 있는 사회는 자나깨나 돈만 생각한다. 개인은 경제적 법칙에 맹복적으로 복종하는 인형일 뿐이다. 그때 우리는 이미 인간일 수 없다. 위궤양 환자가 밤낮 위만 생각한다고 해서 위가 곧 사람일 수는 없다. '가난한 아빠와 부자 아빠'를 통해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돈 법는 법? 돈과 인생? 천만에. 거대한 위를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가르침은 사회적 위협이다.
나무가 많은 예쁜 장환의 앞산이 이미 뚜렷한 실루엣으로 보이고, 멀리 천관산의 섬세한 바위가 흘러내리는 바다로 커다란 해가 넘어가는데, 어찌나 찬란한지 감히 볼 수가 없다. 그 아름다움 위로 배 한 척이 떠 들어오는데, 어부 하나가 능숙한 몸동작으로 그물을 걷고 있다. 시인이 되어 이 풍경을 읊고 싶었다.
천관 초야
-보면, 그대 역시 잊지 못할 것이다
천관산 자락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둥글게 낮아졌다가 다시 다른 산줄기로 검게 이어지는 그곳에 아직 푸른기가 남아 있는 하늘이 걸려 있는데, 그 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이 유별나 아직도 가슴에 역력하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장환의 일몰이 감동이었다면 천관의 초야는 평화로움이었다.
나는 표현력이 부족해 꽃을 보면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묘사하지 못한다. 감각적 재간이 거의 없다. 그저 꽃을 보면 어떻게 생겼다고 말하는 대신 그 꽃을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는 식이다. 그러니 천관산 초야에 보았던 그 부드러운 산자락의 곡선과 회청색 하늘이 만든 절묘한 평화를 전할 능력이 없다. 바라건대 기회가 있으면 이미 해가 져서 큰길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쯤 천관사를 한번 걸어 내려와 보라. 내려오다 좌측에 있는 천관산으로 오르는 오솔기 옆 등산로 표지판 아래를 조금 지나면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이 보일 것이다.
내가 그 새와 친해지려면 정말 알아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우선 그 새가 가장 즐기는 모이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 새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 둘째는 몇 시에 자서 몇 시에 깨는지 알아야 같이 놀아줄 수 있다. 셋째는 정말 그 새와 함께 놀고 싶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자연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있는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
이별의 아픔을 가진 사람은 천관산에 와 바다를 보았으면 한다. 바다 너머 그리움을 보라. 인생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도 이곳에 와서 바다를 보았으면 한다. 이곳은 그리움의 산이다. 양근암과 금수굴이 서로 다른 등성이에 있어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이곳은 그리운 사람들끼리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 가득한 산이다.
연대암 아래 억새밭에서 바다를 보다 가슴이 아프면 뒤를 돌아 천관산의 바위들을 볼 일이다. 아주 많은 바위들이 누워 있거나 잘난 듯이 서 있다. 다른 바위에 기대 있기도 하고 혹은 숨어 있기도 하다. 모양을 이루어 이름이 붙어 있는 바위가 있는가 하면 자유롭게 그저 널브러져 있는 바위 그 자체인 바위도 있다. 바위 하나가 그대로 산을 이루는 북한산의 인수봉이나 노적봉같이 거대하지 않으면서 고만고만한 바위들이 즐비하다. 그대 역시 이 바위들 중 하나이다. 초라하다고 탓하지 마라. 그대가 없으면 인생도 없다.
천관산 장천오미
-숨겨두고 혼자 즐긴다는 말의 의미를 아는가
숨겨놓고 혼자 즐긴다는 의미를 아는가? 벽장에 숨겨놓은 꿀단지여도 좋고 바쁜 날 잠시 겨를을 내어 찾아가는 찻집이어도 좋다. 혹은 서가에 꽂혀 있는 소년 시절의 감명 깊었던 책 한 권이어도 좋다. 마담이 괜찮은 술집이어도 좋다. 아주 어릴 적 왠지 모르게 울고 싶을 때, 저녁이 되어 어머니가 찾아 나설 때까지 숨어 있던 자기만이 아는 작은 비밀 장소처럼 그런 치유의 은밀한 장소와 시간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겠는가?
천관산은 매력이 있다. 처음 왔지만 사흘을 이곳에 머물렀다. 동백도 바위도 작은 억새도 마음에 든다. 이곳의 햇빛도 이 산을 떠는 오래된 이야기도 장안사 보살이 담근 더덕과 칡과 대추를 넣은 달지 않은 술도 그렇다. 언제 또 오늘처럼 낮술에 취할 적이 있으랴. 햇빛이 동백에 가득한데 새들이 저희끼리의 말로 한가로운 봄을 지루해한다. 오늘처럼 즐거운 오후는 드물다. 오늘은 마음껏 동백을 즐겨볼 참이다.
동백은 거리의 가로수로 적당치 않다. 칙칙하고 촌스러워 보인다. 거리를 따라 일렬로 심기에는 벚꽃이 좋다. 벚꽃은 화사한 화장을 하고 거리를 걷는 여인들 같다. 그러나 동백은 거리의 꽃이 아니다. 동백은 숲속의 꽃이다. 숲속의 신비를 담고 있는 기품 있는 꽃이다. 20~30년만 돼도 보기 좋은 발랄한 나무가 아니라 오래오래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운 나무이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처럼.
남도에 오면 특별한 곳에서 동백을 찾을 필요가 없다. 지천에 널린 것이 동백이다. 고목에 피어 있는 동백은 어디나 예쁘다. 한 그루가 있어도 예쁘고 떼지어 피어 있어도 예쁘다. 동백은 남도 사람들의 울타리 속 꽃이다. 그들의 애환이고, 장독대 옆의 일상이며, 간혹 밭일하다 허리를 펼때 웃어주는 그런 꽃이다. 그들의 표현대로 '암시렇지도 않은' 일상의 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안다. 동백이 피지 않으면 그들의 봄도 오지 않는 것을. 그때가 그들의 마지막이라는 것도 안다. 그들이 알기 때문에 나도 안다.
천관산 장안사
-아름다움이 바로 문 밖에 있으니 또 어디로 가랴
한여름처럼 문을 열어 놓았는데, 햇빛이 가득한 마당의 동백꽃을 스쳐온 바람이 방안으로 들어온다. "오~메 좋은거~." 들고양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기웃거린다. 도도한 눈으로 눈을 맞추며 물러서지 않기에 웃어주었더니 슬그머니 마당을 가로질러 간다. 적의를 풀어주는 데는 웃음이 최고다. 남녀노소를 막론하며, 개고 고양이고 다 같다. 만물에 불성이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장안사 보살님은 잊지 않고 이놈에게 밥을 준다. 밥은 좋은 것이다. 적어도 밥을 먹어야 할 시간에 굶는 사람이나 생물은 없어야 한다. 그것이 경제의 의미이다. 한 사람이 밥을 먹고 있다면 또다른 사람도 밥을 먹을 권리가 있다. 이것이 평등이다. 평등만큼 같은 세상에 살고 있음을 유쾌하게 만드는 것이 없다.
-경제학자보다 명징한 경제와 평등의 의미. 절집 들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보살의 행동에서 이만큼 탁월한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 놀랍다.
내 생각에 꿈이란 지금의 자기 이외의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다. 현실적 불만족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러움의 표현이다. 그래서 꿈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어쩌면 약간의 질투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이미 되어 있는 사람이 있거나 가지려고 하는 것을 이미 취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되어 있는 사람이나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도 꿈을 꿀 수 있다. 꿈은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꿈은 씨앗과 같아서 늘 그 속에서 싹이 트고 커다란 나무가 된다. 그러므로 꿈은 또한 현실이다. 아마 다람쥐는 다람쥐 이외의 것이 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보다 더 행복할지 모른다. 저 한 쌍의 다람쥐들이 저렇게 미친 듯이 유희를 하고 있는 이유도 행복해서일 것이다.
108배를 하면 30분 정도 걸린다. 물론 훨씬 더 걸릴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온몸에 땀이 난다. 낮아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때로는 잡념으로 최초의 정성이 흐트러지고, 때로는고단하여 중도에서 그치고 싶어진다. 그리고 다시는 시작하고 싶지 않아지기도 한다. 시작할 때와 같은 초심을 견지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조금 익숙해지면 타성이 붙게 되는데, 그러면 내용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된다. 이때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불가에서 이것을 '발심'이라고 부른다.발심은 초심보다 어렵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개혁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개혁이 진부해질 때 원래의 개혁으로 되돌아가기가 더 어려운 것과 같다. 인간의 습성이 고려되지 않은 개혁과 혁명은 허구이다. 그것은 학살이거나 기만이거나 지나친 망상이다.
-바다가 하도 찬란해 쳐다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아주 친절한 사람이다. 태워주고 자기가 더 즐거워할 사람이다. 자기가 한 일에 즐거워하고 그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다. 실속은 하나도 없지만 실속이 뭐 그리 중요한가. 자신이 즐거운 것보다 더 훌륭한 실속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승복 어린이의 동상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글귀도 같이 있다. 이 동상을 볼 때마다 아직도 우리가 앓고 있는 사상적 질환을 떠올리고 끔찍한 심정이 된다. 늘 속이 쓰린 사람은 24시간 자기의 위만 생각하듯이 사상적 질환에 걸려 있는 정치가는 정치적 생명이 위협받을 때마다 언제나 공산당과 빨갱이 그리고 현존하는 남북의 긴장관계와 이 소년의 죽음에서 연상되는 잔인함을 걸고넘어진다. 그래서 이 소년은 죽어서도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여기에 이렇게 서 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사상적 주장을 하지 않는다. 정치적 수사도 없다. 하지만 이승복 동상에 대한 연민, 초등교육에 대한 질문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오히려 극우세력에 대해 정치적 연민도 느낀다. 바로 '사상적 질환'이라 한 대목에서.
사상이 개인을 넘어서 군림할 때 그것은 전체주의이다. 거기에 자유로운 개인은 없다. 같은 논리로 경제적 질환에 걸려 있는 사회는 자나깨나 돈만 생각한다. 개인은 경제적 법칙에 맹복적으로 복종하는 인형일 뿐이다. 그때 우리는 이미 인간일 수 없다. 위궤양 환자가 밤낮 위만 생각한다고 해서 위가 곧 사람일 수는 없다. '가난한 아빠와 부자 아빠'를 통해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돈 법는 법? 돈과 인생? 천만에. 거대한 위를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가르침은 사회적 위협이다.
나무가 많은 예쁜 장환의 앞산이 이미 뚜렷한 실루엣으로 보이고, 멀리 천관산의 섬세한 바위가 흘러내리는 바다로 커다란 해가 넘어가는데, 어찌나 찬란한지 감히 볼 수가 없다. 그 아름다움 위로 배 한 척이 떠 들어오는데, 어부 하나가 능숙한 몸동작으로 그물을 걷고 있다. 시인이 되어 이 풍경을 읊고 싶었다.
천관 초야
-보면, 그대 역시 잊지 못할 것이다
천관산 자락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둥글게 낮아졌다가 다시 다른 산줄기로 검게 이어지는 그곳에 아직 푸른기가 남아 있는 하늘이 걸려 있는데, 그 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이 유별나 아직도 가슴에 역력하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장환의 일몰이 감동이었다면 천관의 초야는 평화로움이었다.
나는 표현력이 부족해 꽃을 보면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묘사하지 못한다. 감각적 재간이 거의 없다. 그저 꽃을 보면 어떻게 생겼다고 말하는 대신 그 꽃을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는 식이다. 그러니 천관산 초야에 보았던 그 부드러운 산자락의 곡선과 회청색 하늘이 만든 절묘한 평화를 전할 능력이 없다. 바라건대 기회가 있으면 이미 해가 져서 큰길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쯤 천관사를 한번 걸어 내려와 보라. 내려오다 좌측에 있는 천관산으로 오르는 오솔기 옆 등산로 표지판 아래를 조금 지나면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이 보일 것이다.
내가 그 새와 친해지려면 정말 알아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우선 그 새가 가장 즐기는 모이가 무엇인지 알아야 그 새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 둘째는 몇 시에 자서 몇 시에 깨는지 알아야 같이 놀아줄 수 있다. 셋째는 정말 그 새와 함께 놀고 싶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자연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을 알고 있는 경우는 참으로 드물다.
이별의 아픔을 가진 사람은 천관산에 와 바다를 보았으면 한다. 바다 너머 그리움을 보라. 인생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도 이곳에 와서 바다를 보았으면 한다. 이곳은 그리움의 산이다. 양근암과 금수굴이 서로 다른 등성이에 있어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이곳은 그리운 사람들끼리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 가득한 산이다.
연대암 아래 억새밭에서 바다를 보다 가슴이 아프면 뒤를 돌아 천관산의 바위들을 볼 일이다. 아주 많은 바위들이 누워 있거나 잘난 듯이 서 있다. 다른 바위에 기대 있기도 하고 혹은 숨어 있기도 하다. 모양을 이루어 이름이 붙어 있는 바위가 있는가 하면 자유롭게 그저 널브러져 있는 바위 그 자체인 바위도 있다. 바위 하나가 그대로 산을 이루는 북한산의 인수봉이나 노적봉같이 거대하지 않으면서 고만고만한 바위들이 즐비하다. 그대 역시 이 바위들 중 하나이다. 초라하다고 탓하지 마라. 그대가 없으면 인생도 없다.
천관산 장천오미
-숨겨두고 혼자 즐긴다는 말의 의미를 아는가
숨겨놓고 혼자 즐긴다는 의미를 아는가? 벽장에 숨겨놓은 꿀단지여도 좋고 바쁜 날 잠시 겨를을 내어 찾아가는 찻집이어도 좋다. 혹은 서가에 꽂혀 있는 소년 시절의 감명 깊었던 책 한 권이어도 좋다. 마담이 괜찮은 술집이어도 좋다. 아주 어릴 적 왠지 모르게 울고 싶을 때, 저녁이 되어 어머니가 찾아 나설 때까지 숨어 있던 자기만이 아는 작은 비밀 장소처럼 그런 치유의 은밀한 장소와 시간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겠는가?
천관산은 매력이 있다. 처음 왔지만 사흘을 이곳에 머물렀다. 동백도 바위도 작은 억새도 마음에 든다. 이곳의 햇빛도 이 산을 떠는 오래된 이야기도 장안사 보살이 담근 더덕과 칡과 대추를 넣은 달지 않은 술도 그렇다. 언제 또 오늘처럼 낮술에 취할 적이 있으랴. 햇빛이 동백에 가득한데 새들이 저희끼리의 말로 한가로운 봄을 지루해한다. 오늘처럼 즐거운 오후는 드물다. 오늘은 마음껏 동백을 즐겨볼 참이다.
동백은 거리의 가로수로 적당치 않다. 칙칙하고 촌스러워 보인다. 거리를 따라 일렬로 심기에는 벚꽃이 좋다. 벚꽃은 화사한 화장을 하고 거리를 걷는 여인들 같다. 그러나 동백은 거리의 꽃이 아니다. 동백은 숲속의 꽃이다. 숲속의 신비를 담고 있는 기품 있는 꽃이다. 20~30년만 돼도 보기 좋은 발랄한 나무가 아니라 오래오래 나이가 들수록 아름다운 나무이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처럼.
남도에 오면 특별한 곳에서 동백을 찾을 필요가 없다. 지천에 널린 것이 동백이다. 고목에 피어 있는 동백은 어디나 예쁘다. 한 그루가 있어도 예쁘고 떼지어 피어 있어도 예쁘다. 동백은 남도 사람들의 울타리 속 꽃이다. 그들의 애환이고, 장독대 옆의 일상이며, 간혹 밭일하다 허리를 펼때 웃어주는 그런 꽃이다. 그들의 표현대로 '암시렇지도 않은' 일상의 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안다. 동백이 피지 않으면 그들의 봄도 오지 않는 것을. 그때가 그들의 마지막이라는 것도 안다. 그들이 알기 때문에 나도 안다.
천관산 장안사
-아름다움이 바로 문 밖에 있으니 또 어디로 가랴
한여름처럼 문을 열어 놓았는데, 햇빛이 가득한 마당의 동백꽃을 스쳐온 바람이 방안으로 들어온다. "오~메 좋은거~." 들고양이 한 마리가 마당에서 기웃거린다. 도도한 눈으로 눈을 맞추며 물러서지 않기에 웃어주었더니 슬그머니 마당을 가로질러 간다. 적의를 풀어주는 데는 웃음이 최고다. 남녀노소를 막론하며, 개고 고양이고 다 같다. 만물에 불성이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으랴. 장안사 보살님은 잊지 않고 이놈에게 밥을 준다. 밥은 좋은 것이다. 적어도 밥을 먹어야 할 시간에 굶는 사람이나 생물은 없어야 한다. 그것이 경제의 의미이다. 한 사람이 밥을 먹고 있다면 또다른 사람도 밥을 먹을 권리가 있다. 이것이 평등이다. 평등만큼 같은 세상에 살고 있음을 유쾌하게 만드는 것이 없다.
-경제학자보다 명징한 경제와 평등의 의미. 절집 들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보살의 행동에서 이만큼 탁월한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 놀랍다.
내 생각에 꿈이란 지금의 자기 이외의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다. 현실적 불만족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러움의 표현이다. 그래서 꿈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어쩌면 약간의 질투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이미 되어 있는 사람이 있거나 가지려고 하는 것을 이미 취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되어 있는 사람이나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도 꿈을 꿀 수 있다. 꿈은 욕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직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꿈은 씨앗과 같아서 늘 그 속에서 싹이 트고 커다란 나무가 된다. 그러므로 꿈은 또한 현실이다. 아마 다람쥐는 다람쥐 이외의 것이 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보다 더 행복할지 모른다. 저 한 쌍의 다람쥐들이 저렇게 미친 듯이 유희를 하고 있는 이유도 행복해서일 것이다.
108배를 하면 30분 정도 걸린다. 물론 훨씬 더 걸릴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온몸에 땀이 난다. 낮아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때로는 잡념으로 최초의 정성이 흐트러지고, 때로는고단하여 중도에서 그치고 싶어진다. 그리고 다시는 시작하고 싶지 않아지기도 한다. 시작할 때와 같은 초심을 견지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조금 익숙해지면 타성이 붙게 되는데, 그러면 내용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된다. 이때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불가에서 이것을 '발심'이라고 부른다.발심은 초심보다 어렵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개혁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개혁이 진부해질 때 원래의 개혁으로 되돌아가기가 더 어려운 것과 같다. 인간의 습성이 고려되지 않은 개혁과 혁명은 허구이다. 그것은 학살이거나 기만이거나 지나친 망상이다.
천관산 전경-천관산은 여자 같다. 부드러운 능선이 이어지다가 섬세한 바위로 멋을 낸다. 사진:윤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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