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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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학번이 본 영화 [1987]

잡테리어 목공샘 2018. 1. 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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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새해 첫 날, 중2가 되는 큰아들과 영화 [1987]을 조조로 봤다.

1987년... 30년 전이라니.
88학번인 나에게 87년 6월항쟁은 대학 선배들에게 들은 게 전부다. 87년 6월은 부산 서면에서 시작한 학원생활을 서울 노량진으로 옮겨 하고 있을 때였으니 눈앞의 대학입시가 모든 거였던 시기다. 여기저기에서 맡았던 최루연기도 대학생들의 낭만과도 같은 사치라 여겼으니...

88년에 대학에 들어간 후,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5월 광주의 실상을 비디오로 본 나는 '의식화'의 길로 접어든다. 낭만이나 사치는 아니다 정도의 의식화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또렷이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 87년 노량진 단과학원에서 말을 걸 수밖에 없었던 한 여학생을 만난다. 고등학교 중퇴였던 나에게는 연상이었겠지만 학원 복도에서 몇번 마주치고는 마음 설레게 만든 여학생... 첫 대면에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던 그를 88년 6월 서울지역대학교 연합집회에서 만나게 된다. 당시 교문앞에서 돌을 던지다가 백골단을 피해 달아나는데 눈물, 콧물에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간신히 눈을 뜨고 앞에 있는 학우(!)에게 도움을 청하니 휴지를 몇 장 건넨다. 고맙다고 말을 하려고 그를 보니,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지만 분명 노량진의 그 여학생이다. K대...
그 날 저녁은 K대 정리집회를 뒤지고 다닌 기억이 또렷하다. 왠지 모를 연대감에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386의 끝자락에 위치한 88학번은, 87년 항쟁이 비록 미완의 항쟁이라고 말하지만, 그 엄청난 승리의 기억은 공유하지 못한 학번이다. 하지만 88년 6월 추모식에서 보았던 그 열기는  그것이 갖는 역사적 무게만큼은 느끼기에 충분했다. '오렌지족'이라 불리는 몇몇만 빼고 교정 전체가 그 열기에 덮여 있던 6월...

그 열기를 '영화적'으로 담아낸 [1987]. 얼굴만 타고 내리는 눈물을 넘어 몸으로 흐느끼게 만든 수작임에는 틀림없다. 엔딩크래딧 마지막까지 일어설 줄 모르는 대다수, 아니 거의 모든 관객이 그걸 증명한다. 영화를 보기 전 검색해보았던 리뷰들도 대부분 그랬고.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3일 내내 뭔가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을 느낀다.

지난 겨울 촛불을 들면서, 1987년에서 단 한걸음도 못나간 듯한 좌절, 민주정부 10년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하는 절망, 그 깊이와 너비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적폐의 아득함을 느꼈다. 그래서 탄핵과 정권교체라는 승리(?)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인지도.

[1987]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30년의 끝모를 허무를 걷어 줄  어떤 명료함일지도 모르겠다. 단지 미완의 항쟁 한복판을 30년 동안 나름대로 잘 걸어왔다는 위안이 아닌,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고 그러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분명한 해답. 그래서 또다시 30년 흐른 다음, 2017년을 그린 영화는 눈물이 있을지언정, '젖과 꿀이 흐르는' 통일한국의 관객 모두에게 벅찬 감동을 이끌어내는 그런 영화였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게 영화를 보고난 후 '자기 인생 최고의 영화'라고 한 큰아들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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