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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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8

잡테리어 목공샘 2018. 5. 3.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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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촌의 노랑머리
계수님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 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사상을 책에다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조잡하고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가 어렵다고 하는 까닭은 그 사상 자체가 무슨 난해한 내용이나 복잡한 체계를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이란 그것의 내용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 실현된 것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경우 이를 도둑이라 부르고 있거니와, 훌륭한 사상을 말하되 그에 못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 우리는 이를 무어라 이름해야 하는지...

2018년 초, 미투 열풍이 부는 이유, 혹은 그 미투에서 스스로도 자유롭지 못한 이유를 1984년 엽서에서 선생님은 갈파하신다. 교수, 시인, 연출가, 정치인 등등 사회의 리더라고 불리우던(자임하던) 사람들의 이중성, 선생님도 이들을 무어라고 불러야 하는지 묻고 계시다.

모든 문제의 접근이 일단 진실의 규명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맨 먼저 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의 상응관계를 묻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그 삶과 사상이 차질을 빚고 있을 때 제3자가 할 수 있는 일의 상한은, 제3자가 갖는 시각의 이점을 살려 그 차질을 지적해줌으로써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어떤 출발점에 서게 하는 일이 고작이라 생각됩니다.
삶과 사상의 어느 쪽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라는 방법상의 문제는 전혀 그 사람의 처지에 따라 그 사람의 할 나름이겠지만 삶을 내용으로 하고 사상을 형식으로 하는 상호작용의 법칙성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삶의 조건에 먼저 시각을 돌려야 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악하되 삶과 상응된 사상을 문제삼기보다는, 먼저 실천과 삶의 안받침이 없는 고매한(?) 사상을 문제삼아야 하리라 생각됩니다.

일의 명인(전문)
형수님께

1급수들은 휴일을 이용하여 노럭봉사를 하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형수님이 보시고 놀라던 그 긴 복도를 청소하기도 하고, 잡초를 뽑거나 빗물로 메인 배수로를 열기도 하고 땅을 고르는 등 비교적 간단한 작업입니다.
저는 휴일에 작업이 있기만 하면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일을 하면 그 자체가 하나의 '학교'가 되게 마련이지만 특히 제게는 두 사람의 훌륭한 '스승'을 배울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기 때문에 절대로 빠지는 일이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의 스승은 학식도 없고 집안 형편도 어려워 징역살이도 자연 '국으로 찌그러져' 사는 응달의 사람입니다. 제가 이 두 사람을 스승으로 마음두고 있는 까닭은 '일'이 사람을 어떻게 키워주고 사람을 어떻게 개조하는가를 이분들의 말없는 행동을 통하여 깨닫기 때문입니다.
첫째 이 두 사람은 일을 '발견'하는 눈이 매우 탁월합니다. 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미처 일거리로 보이지 않는 것도 이 두 사람의 눈길이 닿으면 마치 조명을 받은 피사체처럼 대뜸 발견되고 맙니다. 그것도 자잘한 잔챙이를 낚아서 바지런떠는 그런 부류와는 달리 별로 힘들이는 기색이나 생색내는 일도 없이 큼직큼직한 일거리, 꼭 필요한 일머리를 제때에 찾아내는 솜씨란 과연 오랜 세월을 일과 더불어 살아온 '일의 명인'다운 풍모를 느끼게 합니다.
둘째로 이 두 사람은 일을 두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가녀린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에 일손을 기다리는 일거리가 있거나 비뚤어져 있는 물건이 한 개라도 있으면 그만 마음이 불편해서 견디지 못하는 그런 심정의 소유자입니다. 이분들에게 있어서 일이란 외부의 어떤 대상이 아니라 삶의 내면을 이루는 존재조건 그 자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심히 걷는 몇 발자국의 걸음 중에도 항상 무엇인가를 바루어놓고 말며, 다른 일로 오가는 중에도 반드시 무얼 하나씩 들고 가고 들고 옵니다. 잠시 동안도 빈손일 때가 없습니다.
셋째로 이 두 사람은 여러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제일 많은 사람이 달라붙는 말단의 바닥일을 골라잡습니다. 일부의, 더러는 먹물이 좀 들어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힘이 덜 들어서가 아니라, 약간 독특한 작업상의 위치를 선호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일정하게 구별하려는 경향이 있음에 비하여 이 두 사람은 언제나 맨 낮은 자리, 그 무한한 대중성 속에 철저히 자신을 세우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두 사람은 제게 다만 일솜씨만을 가르치는 '기술자'의 의미를 넘어서 '사람'을 가르치는 사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두 사람이 걸레를 잡으면 저도 걸레를 잡고, 이 두 사람이 삽을 잡으면 저도 얼른 삽을 잡습니다. 이분들의 옆에 항상 나 자신의 자리를 정함으로 해서 깨달은 사실은 여러 사람들 속에 설 때의 그 든든함이 우리를 매우 힘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교편을 잡으시던 부모님 슬하에서 어려서부터 줄곧 학교에서 자라 노동의 경험은 물론, 노동자들과의 생활마저 부족했던 제게 징역과 징역 속의 여러 스승이 갖는 의미는 실로 막중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다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그 큼을 이루고 꽃송이가 다발이 이루어 큰 꽃이 되는 그 변증법의 비밀이 실은 우리의 가장 비근한 일상의 노동 속에 흔전으로 있는 것임에 새삼 우리들 자신의 맹목을 탓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내주신 책 두 권은 열독이 허가되지 않아 읽지는 못하였습니다만 보내주신 마음은 잘 읽고 있습니다. 사람도 물건도 출입이 어려운 마을에 살고 있음을 알겠습니다.

장기 망태기
형수님께

'1등'이 치러야 하는 긴장감, '모범'이 요구하는 타율성에 비해 '중간은 풍요하고' '꼴찌는 편안하며' '쪼다는 즐겁다'는 역설도 그것을 단순한 자기합리화나 패배주의의 변이라 단정해버릴 수 없는 상당한 양의 진실을 그 곳에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보내주신 형수님의 헝클어진 편지가 마음 흐뭇합니다. 그 속에는 형수님의 적나라한 언어, 아픔, 불만이 시냇물 속의 물고기들처럼 번쩍번쩍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러한 아픔과 불만까지도 제게 열어보여준 그 편지는 형수-시동생이라는 허물없는 관계를 튼튼히 신뢰함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수님께서는 아픈 편지이되 제게는 기쁜 편지였습니다. 다만 형수님께서 감당해야 할 고통이 과중한 것이 아닐까하는 걱정이 저의 흐뭇함을 상쇄시켜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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