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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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6

잡테리어 목공샘 2018. 4. 23.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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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걸음(전문)
형수님께

우리 방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20대의 청년과 가장 느린 50대의 노년의 경주를 하였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실연해본 놀이가 아니라 청년은 한 발로 뛰고 노년은 두 발로 뛰는 일견 공평한 경주였습니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50대 노년이 거뜬히 이겼습니다. 한 발과 두 발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케 해준 한판 승부였습니다. 우김질 끝에 장난삼아 해본 경주라 망정이지 정말 다리가 하나뿐인 불구자의 패배였다면 그 침통함이란 이루 형언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천활동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실성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실천은 인식의 원천인 동시에 그 진리성의 규준이라 합니다.
이처럼 '실천-인식-재실천-재인식'의 과정이 반복되어 실천의 발전과 더불어 인식도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해갑니다. 그러므로 이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거의 결정적인 의미를 띱니다. 그것은 곧 인식의 좌절, 사고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고, 발전하지 못하는 생각이 녹슬 수밖에 없는 이치입니다.
제가징역 초년,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는 생각의 녹을 상대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생각을 녹슬지 않게 간수하기 위해서는 앉아서 녹을 닦고 있을 것이 아니라 생각 자체를 키워나가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컨대 일어서서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랑 많이 일굴수록 쟁깃날은 빛나고', 유수봉하해, 흐르는 물은 바다를 만난다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재확인이었습니다만 이것이 제게 갖는 뜻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일어나서 걷고자 할 경우의 허전함, 다리 하나가 없다는 절망은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게 합니다.
징역 속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맨 처음 시작하는 일이 책을 읽는 일입니다. 그러나 독서는 실천이 아니며 독서는 다리가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역시 한 발 걸음이었습니다. 더구나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한 발 걸음이라 더디다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다른 모든 불구자가 그러듯이 목발을 짚고 걸어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목발로 삼은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험 즉 '과거의 실천'이었습니다.
목발은 비록 단단하기는 해도 자기의 피가 통하는 생다리와 같을 수 없기 때문에 두 개의 다리가 줄곧 서로 차질을 빚어 걸음이 더디고, 뒤뚱거리고, 넘어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이 어색한 걸음새도 세월이 흐르고 목발에 손때가 묻으면서 그러저럭 이력이 나고 보속과 맵시(?)가 붙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의 소위 이력이란 것이 제게는 매우 귀중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발이 생다리를 닮아서 이루어진 숙달이 아니라 반대로 생다리가 목발을 배워서 이루어진 숙달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인식이 내가 목발로 삼은 그 경험들의 임자들의 인식을 배우고 그것을 닮아감으로써 비로소 걸음걸이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목발의 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다리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사전에는 반대로 예상햇던 것이었던 만큼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징역 동료들의 경험들이 단지 과거의 것으로 화석화되어 있지 않고 현재의 징역 그 자체와 튼튼히 연계되거나 그 일부를 구성하고 있음으로 해서 강력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실천이란 죽은 실천이 아니라 살아서 숨쉬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의 발견은 나의 목발에 피가 통하고 감각이 살아나는 듯한 감동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실천이란 반드시 극적 구조를 갖춘 큰 규모의 일만이 아니라 사람이 있고 일거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흔전으로 널려 있다는 제법 익은 듯한 생각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걸음걸이로 저마다의 인생을 걸어가는 것이겠지만, 땅을 박차서 땅을 얻든, 그 위에 쓰러져 그것을 얻든, 죽어서 땅 속에 묻히기까지는 거대한 실천의 대륙 위를 걸어가게 마련이라 생각됩니다.
3월, 길고 추웠던 겨울이 끝나려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옥담 밑 어느 후미진 곳에 봄은 벌써 작은 풀싹으로 와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떻든 봄은 산 너머 남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발 밑의 언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수만 잠 묻히고 묻힌 이 땅에
계수님께

이삿짐 싸느라고 한창입니다. 일도 많거니와 주변도 어수선합니다.
자기 짐이 많은 사람은 남의 일손을 도울 겨를이 없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도리어 적게 가진 사람의 도움을 받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빈손이 일손입니다. 적게 가지고 살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버려야 하는데 작은 것 하나버리는 데도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용기는 선택이며 선택은 골라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는 한쪽을 버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징역보따리 내려놓자
아버님께

구 교도소의 철문을 버스로 나올 때 우리들은 20여 분의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사회'를 보는 기쁨에, 옥담 벗어나는 해방감(?)에 저마다 흐르는 물이 되어 즐거운 소리 내더니 저만치 새 교도소의 높은 감시대와 견고한 주벽이 달려오자 어느새 하나둘 말수가 줄면서 고인 물처럼 침묵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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