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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용기
계수님께
새해가 겨울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까닭은 낡은 것들이 겨울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낡은 것들로부터의 결별이 새로움의 한 조건이고 보면 칼날 같은 추위가 낡은 것들을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겨울의 한복판에 정월 초하루가 자리잡고 있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세모에 지난 한 해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나는 이 겨울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자르고, 무엇을 잊으며, 무엇을 간직해야 할지 생각해봅니다.
세들어 사는 인생
형수님께
세상에는 남의 행복과 비교해서 느끼는 불행이 있는가 하면 남의 불행과 비교해서 얻는 작은 위로도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를 부정한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 설사 부정한 여자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를 자기의 아내의 자리에 앉히기를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저로서는, 알고 있는 일이긴 하나 정작 부딪치고 보면 상당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내의 정절에 대한 세상의 모든 남편들의 당연한 요구가 그의 삶에 있어서는 얼마나 고급한 것인가를 일깨워줍니다.
이를테면 창녀와 그의 '가난한 단골'과의 관계가 곧 일부1/10처, 또는 일처1/10부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꾸릴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의 소외된 결혼형태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서울의 외곽에 빈촌이 있듯이 일부일처제의 외곽에 있는 빈혼, 즉 빈남빈녀들의 군혼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도덕의 문란이 만들어낸 윤리적인 차원의 문제로 파악하는 태도는 본말을 전도한 피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의 집 방 한 칸을 얻어 세들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이처럼 아내를 또는 남편을 세들어 사는 그런 삶도 없지 않습니다.
노소의 차이
계수님께
노인들의 젊은이에 대한 불만 중에 가장 자주 듣는 것은, 젊은이들은 여기저기 벌여놓기만 하고 마무리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고 나중 할 일을 혼동하는가 하면 일손을 모아서 함께 해야 할 것도 제각각 따로따로 벌여놓기 때문에 부산하기만 하고 진척이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태도가 어디서 온 것인가를 어느 좌상님께 여쭈어보았더니 한마디로 농사일을 해보질 않아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간결하고 정곡을 찌른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농사일은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일관된 노동입니다. 일의 선후가 있고, 계절이 있고,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생명인 이를테면 볍씨의 일생이면서 그 우주입니다. 부품을 분업 생산하여 조립, 완성하는 공업노동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젊은애들 도회지 나가서 잃은 것이 어디 한둘인가.' 그 좌상님의 개탄이 제게는 육중한 무게의 문명비판으로 들립니다.
젊은이들은 노동을 수고로움, 즉 귀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비하여 노인들은 거기에다 자신을 실현하고 생명을 키우는 높은 뜻을 부여합니다. 요컨데 젊은이들은 노동을 '소비'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소비, 에너지의 소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점 노동을 생산으로 인식하는 노인들의 사고와 정면에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공업노동, 분업노동의 경험은, 더욱이 상품 생산, 피고용노동인 경우 노동이 이룩해내는 생산물에 대한 총합적인 가치인식을 가지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노동이 그 노동의 주체인 자기 자신을 성장시켜준다는 인격적 측면에 대해서는 하등의 신뢰나 실감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열악한 현장에서 겪은 체험의 소산이겠습니다만, 이러한 태도는 일차적으로는 일 그 자체에 대한 태도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일하는 사람들간의 인간관계에 정착됨으로써 사회화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손으로 창조한 것을 자각케 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떠한 사회적 관련을 갖는가, 그리고 자기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과 어떻게 연대되는가를 실감케 하는 부단한 계기를 생활의 현장, 그 경제적 기초 위에 창조해내는 운동이야말로 민중들의 합의된 결단을 이끌어내고 지연, 혈연 또는 작업장이라는 한정된 범위를 뛰어넘어 '공동의 터전'을 이룩하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여름 징역살이(전문)
계수님께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인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 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이를 두고 성급한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의 도덕성의 문제로 받아들여 그 인성을 탓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내일 온다 온다 하던 비 한줄금 내리고 나면 노염도 더는 버티지 못할 줄 알고 있으며, 머지않아 조석의 추량은 우리들끼리 서로 키워왔던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거두어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처럼 정갈하고 냉철한 인식을 일깨워줄 것임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다사했던 귀휴 1주일의 일들도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아마 한 장의 명함판 사진으로 정리되리라 믿습니다.
작은 실패
형수님께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 그것은 산에 나무가 있고 땅 속에 바위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를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계수님께
새해가 겨울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까닭은 낡은 것들이 겨울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낡은 것들로부터의 결별이 새로움의 한 조건이고 보면 칼날 같은 추위가 낡은 것들을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겨울의 한복판에 정월 초하루가 자리잡고 있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세모에 지난 한 해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나는 이 겨울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자르고, 무엇을 잊으며, 무엇을 간직해야 할지 생각해봅니다.
세들어 사는 인생
형수님께
세상에는 남의 행복과 비교해서 느끼는 불행이 있는가 하면 남의 불행과 비교해서 얻는 작은 위로도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를 부정한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 설사 부정한 여자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를 자기의 아내의 자리에 앉히기를 조금도 꺼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저로서는, 알고 있는 일이긴 하나 정작 부딪치고 보면 상당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내의 정절에 대한 세상의 모든 남편들의 당연한 요구가 그의 삶에 있어서는 얼마나 고급한 것인가를 일깨워줍니다.
이를테면 창녀와 그의 '가난한 단골'과의 관계가 곧 일부1/10처, 또는 일처1/10부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꾸릴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의 소외된 결혼형태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서울의 외곽에 빈촌이 있듯이 일부일처제의 외곽에 있는 빈혼, 즉 빈남빈녀들의 군혼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도덕의 문란이 만들어낸 윤리적인 차원의 문제로 파악하는 태도는 본말을 전도한 피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의 집 방 한 칸을 얻어 세들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이처럼 아내를 또는 남편을 세들어 사는 그런 삶도 없지 않습니다.
노소의 차이
계수님께
노인들의 젊은이에 대한 불만 중에 가장 자주 듣는 것은, 젊은이들은 여기저기 벌여놓기만 하고 마무리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고 나중 할 일을 혼동하는가 하면 일손을 모아서 함께 해야 할 것도 제각각 따로따로 벌여놓기 때문에 부산하기만 하고 진척이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태도가 어디서 온 것인가를 어느 좌상님께 여쭈어보았더니 한마디로 농사일을 해보질 않아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간결하고 정곡을 찌른 지적이라고 생각됩니다. 농사일은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일관된 노동입니다. 일의 선후가 있고, 계절이 있고,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생명인 이를테면 볍씨의 일생이면서 그 우주입니다. 부품을 분업 생산하여 조립, 완성하는 공업노동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젊은애들 도회지 나가서 잃은 것이 어디 한둘인가.' 그 좌상님의 개탄이 제게는 육중한 무게의 문명비판으로 들립니다.
젊은이들은 노동을 수고로움, 즉 귀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비하여 노인들은 거기에다 자신을 실현하고 생명을 키우는 높은 뜻을 부여합니다. 요컨데 젊은이들은 노동을 '소비'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소비, 에너지의 소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점 노동을 생산으로 인식하는 노인들의 사고와 정면에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공업노동, 분업노동의 경험은, 더욱이 상품 생산, 피고용노동인 경우 노동이 이룩해내는 생산물에 대한 총합적인 가치인식을 가지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노동이 그 노동의 주체인 자기 자신을 성장시켜준다는 인격적 측면에 대해서는 하등의 신뢰나 실감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열악한 현장에서 겪은 체험의 소산이겠습니다만, 이러한 태도는 일차적으로는 일 그 자체에 대한 태도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동시에 일하는 사람들간의 인간관계에 정착됨으로써 사회화되는 것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손으로 창조한 것을 자각케 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떠한 사회적 관련을 갖는가, 그리고 자기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과 어떻게 연대되는가를 실감케 하는 부단한 계기를 생활의 현장, 그 경제적 기초 위에 창조해내는 운동이야말로 민중들의 합의된 결단을 이끌어내고 지연, 혈연 또는 작업장이라는 한정된 범위를 뛰어넘어 '공동의 터전'을 이룩하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여름 징역살이(전문)
계수님께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인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 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이를 두고 성급한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의 도덕성의 문제로 받아들여 그 인성을 탓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내일 온다 온다 하던 비 한줄금 내리고 나면 노염도 더는 버티지 못할 줄 알고 있으며, 머지않아 조석의 추량은 우리들끼리 서로 키워왔던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거두어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처럼 정갈하고 냉철한 인식을 일깨워줄 것임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다사했던 귀휴 1주일의 일들도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아마 한 장의 명함판 사진으로 정리되리라 믿습니다.
작은 실패
형수님께
실패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의 발견이 필요한 것이며, 실패가 값진 것이 아니라 실패의 교훈이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패와 그 실패의 발견, 그것은 산에 나무가 있고 땅 속에 바위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 튼튼한 뼈대를 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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