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지속가능한 지구살이를 위해 재활용/친환경/ DIY 공부 중

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1

잡테리어 목공샘 2018. 3. 31.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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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
형수님께

눈이 오는 날은 눈사람처럼 속까지 깨끗하게 되고 싶다던 '무구한 가슴'이 생각납니다. 모든 추함 까지도 은신시키는 기만의 백색에 둘리지 말자던 '냉철한 머리'가 아울러 생각납니다.
그러나 눈이 오는 날은 역시 후에 치러야 할 긴 한고에도 불구하고 우선은 상당한 감정의 상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도
아버님께

'아름다움'이란 바깥 형식에 의해서라기보다 속 내용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규정되는 법임을 확인하는 심정입니다.
서도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자획의 모양보다는 자구에 담긴 뜻이 좋아야 함은 물론 특히 그 '사람'이 훌륭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작품과 인간이 강하게 연대되고 있는 서도가, 단지 작품만으로 평가되는 인간 부재의 다른 분야보다 마음에 듭니다. 좋은 글씨를 남기기 위하여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상식이 마음 흐뭇합니다. 인간의 품성을 높이는 데 복무하는 '예술'과 예술적 가치로 전화되는 '인간의 품성'과의 통일, 이 통일이 서도에만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근묵자의 자위이겠습니까.

꿈마저 징역살이
계수님께

교도소의 꿈은 대개 피곤한 아침을 남겨놓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지바른 시냇가를 두고 입방 시간에 늦을까봐 부랴부랴 교도소로 돌아오는 꿈이라든가... 징역살이 10년을 넘으면 꿈에도 교도소의 그 거대한 인력을 벗지 못하고 꿈마저 징역 사는가 봅니다. 우리는 먼저 꿈에서부터 출소해야 하는 이중의 벽 속에 있는 셈이 됩니다.

더 이상 잃을 것 없이
형수님께

더 이상 잃을 것 없이 헌옷 입고 봄볕에 앉아 있는 즐거움이 은자의 아류쯤 됩니다.

속눈썹에 무지개 만들며
형수님께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내다가 만 듯 무척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동향인 우리 방에는 아침에 방석만한 햇볕 두 개가 들어옵니다. 저는 가끔 햇볕 속에 눈감고 속눈썹에 무수한 무지개를 만들어봄으로써 화창한 5월의 한 조각을 가집니다.

한 송이 팬지꽃
계수님께

흙 한 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내가 과연 꽃 한송이라도 피울 수 있는지,  5월의 창가에서 나는 팬지꽃이 부끄럽습니다.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부모님께

해마다 7월이 되면 어느덧 지나온 날을 돌아보는 마음이 됩니다. 금년 7월은 제가 징역을 시작한 지 12년이 되는 달입니다. 궁벽한 곳에 오래 살면 관점마저 자연히 좁아지고 치우쳐, 흡사 동굴 속에 사는 사람이 동굴의 아궁이를 동쪽이라 착각하듯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저러한 견해가 주관 쪽으로 많이 기운 것이 되어 있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주관의 양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고 객관적인 견해를 더 많이 수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바닥에는, 주관은 궁벽하고 객관은 평정한 것이며, 주관은 객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객관은 주관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히 발목 박고 서서 그 '곳'에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해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전체와 튼튼히 연대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고의 동굴을 벗어나는 길은 그 삶의 터전을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스스로 시대의 복판에 서기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시대와 역사의 대하로 향하는 어느 가난한 골목에 서기를 주저해서도 안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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