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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으로 날아든 민들레씨
아버님께
작년 이맘때의 생일연이 어제 일같이 가깝게 기억되는데 그것이 벌써 일년이나 전의 일이고 보면 저희들은 세월의 흐름에 어지간히 무디어진 것 같습니다. 1, 2년쯤 아무 하는 일 없이 지내기를 예사로 여기는 둔감함은 설령 징역살이에 필요한 감각이라 할지라도 좋은 습벽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버릇은, 특별히 절실한 일에 쫓기지 않는 데다 또 생활이 단조로워서 다양한 경험을 가질 수 없음에 연유하는 듯합니다.절실한 일이 없으면 응달의 풀싹처럼 자라지 못하며, 경험이 편벽되면 한쪽으로만 굴린 눈덩이처럼 기형화할 위험이 따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 살면서 성격의 굴절을 막고 구김살 없이 되가란 무척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물론, 개개인이 각자 자기 완결적인 덕성을 도야해가는 개인주의적 결벽성보다는 나는 이것을, 너는 저것을 갖추어 혼자로서는 비록 인격적으로 빈 곳이 많을지라도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 연대성의 든든한 바탕에 인격의 뿌리를 내림으로써 사회적 미덕 속에서 개인적 덕성을 완성해가는 쪽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의 성격적 결함을 두호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슬픔도 사람을 키웁니다.
부모님께
기쁨과 마찬가지로 슬픔도 사람을 키운다는 쉬운 이치를 생활의 골목골목마다에서 확인하면서 여름 나무처럼 언제나 크는 사람을 배우려 합니다.
피서의 계절(전문)
아버님께
일찍 닥친 더위를 보면 올해는 상당히 긴 여름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예년처럼 올해도 피서함으로써 피서하려고 합니다만 눈에 띄는 책이 많아 막상 피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책'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대개의 책은 실천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너무나 흰 손에 의하여 집필된 경험의 간접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객관적 관조와 지적 여과를 겨쳐 현장인들의 체험에 붙어다니기 쉬운 경험의 일면성, 특수성, 우연성 등의 주관적 측면을 지양하여 고도의 보편성을 갖는 체계적 지식으로 정리되기는커녕, 집필자 개인의 관심이나 이해관계 속으로 도피해버리거나, 전문분야라는 이름 아래 지엽말단을 번다하게 과장하여 근본을 흐려놓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책에서 얻은 지식이 흔히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그림자이기 쉽습니다. 그것은 실천에 의해 검증되지 않고, 실천과 함께 발전하지도 않는 허약한 가설, 낡은 교조에 불과할 뿐 미래의 실천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입니다. 진시황의 분서를 욕할 수만도 없습니다.
비록 여름이 아니더라도 저는 책에서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설령 책에서 무슨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태를 옳게 판단하거나 일머리를 알아 순서 있게 처리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태반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머리 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지식이라 불러온 것이 사실입니다. 출석부의 명단을 죄다 암기하고 교실에 들어간 교사라 하더라도 학생의 얼굴에 대하여 무지한 한, 단 한 명의 학생도 맞출 수 없습니다. '이름'은 나중에 붙는 것, 지식은 실천에서 나와 실천으로 돌아가야 참다운 것이라 믿습니다.
지난번 새마을 연수교육 때 본 일입니다만, 지식이 너무 많아 가방 속에까지 담아와서 들려주던 안경 낀 교수의 강의가 무력하고 공소한 것임에 반해 빈 손의 작업복으로 그 흔한 졸업장 하나 없는 이가 전해주던 작은 사례담이 뼈 있는 이야기가 되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합니다.
그런 교수가 될 뻔했던 제 자신을 아찔한 뉘우침으로 돌이켜봅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봅니다. 지식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바르게 살 수 없는 동네가 없듯이, 우리는 어느 곳에 몸을 두고 있든 배움의 재료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여름도 피서의 계절, 더운 욕탕에 들어가듯 훌훌 벗어서 버리는 계절로 맞이하려고 합니다.
여름 더위에 가내 두루 평안하시길 빕니다.
추성만정 충즉즉
아버님께
'길'이란 그 '향'하는 바가 먼저 있고 나서 다시 무수한 발걸음이 다지고 다져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붓끝처럼 스스로를 간추리게 하는 송연하리만큼 엄정한 마음가짐이 아니고서 감히 무엇을 이루려 하는 것은 한마디로 '탐욕'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 기계적으로 필사하다가 '아차' 싶다. '송연하리만큼 엄정한 마음가짐'이라. 처음 필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보름 정도 아침마다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원했던 건 무엇이었나. 이루고자 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나.
늘 글을 쓰고 싶다, 되도록이면 잘 쓰고 싶다라는 바램이 있었다. 고 이오덕 선생님부터 이만교, 유시민, 나탈리 골드버그 등 글쓰기에 대한 책을 보고...
시인 조동범, 시나리오 작가 백승재, 여행작가 김수진님의 글쓰기 특강을 듣고...
무엇보다 첫 필사책인 '떠남과 만남'의 구본형 선생님과 지금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신영복 선생님의 저작들을 보면서...
그런 바램은 더욱 켜지고 절실해졌다. 그래서 '필사'를 시작했던 것인데, 위의 글은 그런 바램에 대해 반성하게 하는 아픔이 있다.
엄정한 마음가짐, 탐욕,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반추해야겠다. 선생님께 감사하다.
아버님께
작년 이맘때의 생일연이 어제 일같이 가깝게 기억되는데 그것이 벌써 일년이나 전의 일이고 보면 저희들은 세월의 흐름에 어지간히 무디어진 것 같습니다. 1, 2년쯤 아무 하는 일 없이 지내기를 예사로 여기는 둔감함은 설령 징역살이에 필요한 감각이라 할지라도 좋은 습벽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버릇은, 특별히 절실한 일에 쫓기지 않는 데다 또 생활이 단조로워서 다양한 경험을 가질 수 없음에 연유하는 듯합니다.절실한 일이 없으면 응달의 풀싹처럼 자라지 못하며, 경험이 편벽되면 한쪽으로만 굴린 눈덩이처럼 기형화할 위험이 따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 살면서 성격의 굴절을 막고 구김살 없이 되가란 무척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물론, 개개인이 각자 자기 완결적인 덕성을 도야해가는 개인주의적 결벽성보다는 나는 이것을, 너는 저것을 갖추어 혼자로서는 비록 인격적으로 빈 곳이 많을지라도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 연대성의 든든한 바탕에 인격의 뿌리를 내림으로써 사회적 미덕 속에서 개인적 덕성을 완성해가는 쪽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의 성격적 결함을 두호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슬픔도 사람을 키웁니다.
부모님께
기쁨과 마찬가지로 슬픔도 사람을 키운다는 쉬운 이치를 생활의 골목골목마다에서 확인하면서 여름 나무처럼 언제나 크는 사람을 배우려 합니다.
피서의 계절(전문)
아버님께
일찍 닥친 더위를 보면 올해는 상당히 긴 여름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예년처럼 올해도 피서함으로써 피서하려고 합니다만 눈에 띄는 책이 많아 막상 피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책'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대개의 책은 실천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너무나 흰 손에 의하여 집필된 경험의 간접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객관적 관조와 지적 여과를 겨쳐 현장인들의 체험에 붙어다니기 쉬운 경험의 일면성, 특수성, 우연성 등의 주관적 측면을 지양하여 고도의 보편성을 갖는 체계적 지식으로 정리되기는커녕, 집필자 개인의 관심이나 이해관계 속으로 도피해버리거나, 전문분야라는 이름 아래 지엽말단을 번다하게 과장하여 근본을 흐려놓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책에서 얻은 지식이 흔히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그림자이기 쉽습니다. 그것은 실천에 의해 검증되지 않고, 실천과 함께 발전하지도 않는 허약한 가설, 낡은 교조에 불과할 뿐 미래의 실천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입니다. 진시황의 분서를 욕할 수만도 없습니다.
비록 여름이 아니더라도 저는 책에서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설령 책에서 무슨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태를 옳게 판단하거나 일머리를 알아 순서 있게 처리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태반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머리 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지식이라 불러온 것이 사실입니다. 출석부의 명단을 죄다 암기하고 교실에 들어간 교사라 하더라도 학생의 얼굴에 대하여 무지한 한, 단 한 명의 학생도 맞출 수 없습니다. '이름'은 나중에 붙는 것, 지식은 실천에서 나와 실천으로 돌아가야 참다운 것이라 믿습니다.
지난번 새마을 연수교육 때 본 일입니다만, 지식이 너무 많아 가방 속에까지 담아와서 들려주던 안경 낀 교수의 강의가 무력하고 공소한 것임에 반해 빈 손의 작업복으로 그 흔한 졸업장 하나 없는 이가 전해주던 작은 사례담이 뼈 있는 이야기가 되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합니다.
그런 교수가 될 뻔했던 제 자신을 아찔한 뉘우침으로 돌이켜봅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봅니다. 지식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바르게 살 수 없는 동네가 없듯이, 우리는 어느 곳에 몸을 두고 있든 배움의 재료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여름도 피서의 계절, 더운 욕탕에 들어가듯 훌훌 벗어서 버리는 계절로 맞이하려고 합니다.
여름 더위에 가내 두루 평안하시길 빕니다.
추성만정 충즉즉
아버님께
'길'이란 그 '향'하는 바가 먼저 있고 나서 다시 무수한 발걸음이 다지고 다져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붓끝처럼 스스로를 간추리게 하는 송연하리만큼 엄정한 마음가짐이 아니고서 감히 무엇을 이루려 하는 것은 한마디로 '탐욕'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 기계적으로 필사하다가 '아차' 싶다. '송연하리만큼 엄정한 마음가짐'이라. 처음 필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보름 정도 아침마다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원했던 건 무엇이었나. 이루고자 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나.
늘 글을 쓰고 싶다, 되도록이면 잘 쓰고 싶다라는 바램이 있었다. 고 이오덕 선생님부터 이만교, 유시민, 나탈리 골드버그 등 글쓰기에 대한 책을 보고...
시인 조동범, 시나리오 작가 백승재, 여행작가 김수진님의 글쓰기 특강을 듣고...
무엇보다 첫 필사책인 '떠남과 만남'의 구본형 선생님과 지금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신영복 선생님의 저작들을 보면서...
그런 바램은 더욱 켜지고 절실해졌다. 그래서 '필사'를 시작했던 것인데, 위의 글은 그런 바램에 대해 반성하게 하는 아픔이 있다.
엄정한 마음가짐, 탐욕,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반추해야겠다. 선생님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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