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지속가능한 지구살이를 위해 재활용/친환경/ DIY 공부 중

전체 글 248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31

인동의 지혜 형수님께 겨울추위는 이처럼 역경에서 발휘되는 강한 생명력을 확인하고 신뢰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겨울 추위는 몸을 차게 하는 대신 생각을 맑게 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여름보다 겨울을 선호합니다. 다른 계절 동안 자잘한 감정에 부대끼거나 신변잡사에 얽매여 있던 생각들이 드높은 정신 세계로 시원하게 정돈되고 고양되는 것도 필경 겨울에 서슬져 있는 이 추위 때문이라 믿습니다. 추위는 흡사 '가난'처럼 불편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불편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땜통 미싱사 계수님께 두 줄로 길게 늘어선 미싱대의 한 자리를 차고 앉아서 정신 없이 미싱을 밟다보면 마치 평화시장의 피복공장에 앉아 있는 듯한 연대감이 가슴 뿌듯하게 합니다. 작업이 종료되면 잔업식으로 나오는 뜨끈한 수제비 한 그..

독서일기/필사 2018.05.16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30

지혜와 용기 계수님께 새해가 겨울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까닭은 낡은 것들이 겨울을 건너지 못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낡은 것들로부터의 결별이 새로움의 한 조건이고 보면 칼날 같은 추위가 낡은 것들을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겨울의 한복판에 정월 초하루가 자리잡고 있는 까닭을 알겠습니다. 세모에 지난 한 해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나는 이 겨울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자르고, 무엇을 잊으며, 무엇을 간직해야 할지 생각해봅니다. 세들어 사는 인생 형수님께 세상에는 남의 행복과 비교해서 느끼는 불행이 있는가 하면 남의 불행과 비교해서 얻는 작은 위로도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를 부정한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 설사 부정한 여..

독서일기/필사 2018.05.15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9

무릎 끓고 사는 세월 아버님께 밤새워 일하는 사람들이 켜놓은 불빛은 그렇지 않은 사람까지도 밝혀줍니다. 벼베기(전문) 계수님께 이번 가을에는 벼베기를 도우러 몇 차례의 바깥 나들이를 하였습니다. 교도소 논에 이틀, 대민지원으로 하루, 도합 사흘간의 가을일을 한 셈입니다. 오늘은 그때의 낙수 몇 가지를 적어봅니다. 사회참관이나 외부작업을 하러 교도소의 육중한 철문을 나설 때 우리들이 습관적으로 갖는 심정은, 이것은 진짜 출소가 아니라는 다짐입니다. 혹시나 감상에 빠지기 쉬운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스스로 경계함인가 합니다. 철문 나서면 맨 먼저 구봉산이 성큼 다가와 가슴에 안깁니다. 산은 역시 가슴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감방에서 쇠창살 사이로 보는 것은 '엿보는 것'이었나 봅니다. 1킬로미터는 좋이 뻗은..

독서일기/필사 2018.05.04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8

창녀촌의 노랑머리 계수님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 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사상을 책에다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조잡하고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훌륭한 사상을 갖기..

독서일기/필사 2018.05.03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7

닫힌 공간, 열린 공간 형수님께 긴장과 갈등으로 팽팽히 맞선 관계는 대자적 인식의 한 조건일 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관계의 실상입니다. 관계를 맺고 난 후의 편안하게 길들여진 안거는 일견 '관계의 완성' 또는 '완숙한 관계'와 같은 외모를 하고 있지만 그 내부에는 그것을 가져다준 관계 그 자체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음을, 이미 붕괴가 끝나가고 있음을 허다히 보아왔기 째문입니다. 비단 갇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튼튼한 연대감이야말로 닫힌 공간을 열고, 저 푸른 하늘을 숨쉬게 하며... 그리하여 긴장과 갈등마저 넉넉히 포용하는 거대한 대륙에 발 딛게 하는 우람한 힘이라 믿고 있습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픔'을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봅니다..

독서일기/필사 2018.05.01

홀아비가 김치찌개에 눈물을 흘린 까닭은...

나이 오십에 홀아비 김치찌개 밥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다. '나이 50'이 된 건, 뭐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닌 세월에 흐르다보니 그리 된 것이고... '홀아비'란 아내가 해외로 연수를 떠난 일주일 간의 호칭이라 그닥 처연하지도 않지만... '김치찌개 밥상', 이건 쫌 처량하다. 요즘 날마다 간벌목 커팅-나무가 주는 즐거움-에 온 몸이 쑤신 지 오래... 오늘로 6만개를 돌파했다. 동네 형님이랑 했으니 나 혼자서는 3만개, 즉 각도절단기를 3만번 내렸다 올렸다를 했다는 얘기. 무슨 에너자이저도 아니고... 그러다보니 아내도 없는 저녁 밥상을 홀로 차리고 아침에 먹던 김치찌개에다 식은 밥 한덩이를 넣고 비벼 먹는 게 저녁 메뉴가 된 셈. '아이고 내 팔자야.' 하며 비비던 중 그만 김칫국물이 튀어 눈으로 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6

한 발 걸음(전문) 형수님께 우리 방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20대의 청년과 가장 느린 50대의 노년의 경주를 하였습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실연해본 놀이가 아니라 청년은 한 발로 뛰고 노년은 두 발로 뛰는 일견 공평한 경주였습니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50대 노년이 거뜬히 이겼습니다. 한 발과 두 발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케 해준 한판 승부였습니다. 우김질 끝에 장난삼아 해본 경주라 망정이지 정말 다리가 하나뿐인 불구자의 패배였다면 그 침통함이란 이루 형언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천활동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독서일기/필사 2018.04.23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5

시험의 무게 형수님께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여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로 보는 데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되기도 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은 그 즐거움은 놀이이며, 궁리는 학습이고, 만들어내는 행위는 곧 노동이 됩니다. 이러한 생활 속의 즐거움이나 일거리와는 하등의 인연도 없이 칠판에 백묵으로 적어놓은 것이나 종이에 인쇄된 것을 '진리'라고 믿으라는 '요구'는 심하게 표현한다면 어른들의 폭력이라 해야 합니다. 이런 무리한 요구에 억눌려 자라지 못하는 무수한 가능성의 싹..

독서일기/필사 2018.04.21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4

무거운 흙 계수님께 나는 그날 이곳의 흙 한줌을 가지고 가서 새 교도소의 땅에 묻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으로 얼룩진 흙 한 줌을 떼어들자 역사의 한 조각을 손에 든 양 천 근의 무게가 잠자는 나의 팔을 타고 뛰어들어 심장의 전율로 맥박칩니다. 나는 이 살아서 숨쉬는 흙 한 줌을 나의 가슴에 묻듯이 새 교도소의 땅에 묻고 돌아왔습니다. 불더위와 물소나기가 그리도 팽팽히 싸웠쌓더니, 끝내 더위가 한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긴 것은 물이 아니라 세월이었다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추위가 닥치기까지의 짧은 가을을 앞에 놓고, 나는 더위에 힘부쳐 헝클어진 생각을 잘 꾸려서 그런대로의 마무리를 해두고 싶습니다. 독다산 유감 아버님께 생사별리 등 갖가지 인간적 고초로 가득 찬 18년에 걸친 유형의 세월..

독서일기/필사 2018.04.18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3

죄명과 형기 계수님께 죄명은 그 사람의 '질'을, 형기는 그 질의 '정도'를 상징합니다. '관계'는 '관점'을 결정합니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경우에는 이 바라본다는 행위는 그를 알려는 태도가 못됩니다.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 과거에 투영된 현재 부모님께 역사현상은 그것이 개인이든 사건이든, 하나의 단절된 객체로 한정할 수 없으며, 그것에 선행하는 여러 가지의 계기에서부터 그것의 발전, 변용의 가능한 방향에 긍하는 총합과정의 한 부문으로서 파악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더욱이 '과거'란 완성되고 끝마쳐진 어떤 불변의 것이 아니며, 반..

독서일기/필사 201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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