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지속가능한 지구살이를 위해 재활용/친환경/ DIY 공부 중

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4

잡테리어 목공샘 2018. 4. 18.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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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흙
계수님께

나는 그날 이곳의 흙 한줌을 가지고 가서 새 교도소의 땅에 묻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땀으로 얼룩진 흙 한 줌을 떼어들자 역사의 한 조각을 손에 든 양 천 근의 무게가 잠자는 나의 팔을 타고 뛰어들어 심장의 전율로 맥박칩니다. 나는 이 살아서 숨쉬는 흙 한 줌을 나의 가슴에 묻듯이 새 교도소의 땅에 묻고 돌아왔습니다.
불더위와 물소나기가 그리도 팽팽히 싸웠쌓더니, 끝내 더위가 한풀 꺾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긴 것은 물이 아니라 세월이었다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추위가 닥치기까지의 짧은 가을을 앞에 놓고, 나는 더위에 힘부쳐 헝클어진 생각을 잘 꾸려서 그런대로의 마무리를 해두고 싶습니다.

독다산 유감
아버님께

생사별리 등 갖가지 인간적 고초로 가득 찬 18년에 걸친 유형의 세월을 빛나는 창조의 공간으로 삼은 '비약'이 부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비약은 그 어감에서 느껴지는 화려함처럼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는 '곱셈의 논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보호색과 문신
형수님께

부모의 보호가 없음은 물론, 자기자신을 지킬 힘도, 최소한의 무기도 없는 애벌레들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궁리해낸 기만, 도용, 가탁의 속임수들이 비열해보이기보다는 과연 살아가는 일의 진지함을 깨닫게 합니다.
교도소에는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이 많습니다. 전과가 한두 개 더 되는 사람이면 십중팔구 바늘로 살갗을 찔러 먹물을 넣는 소위 '이레즈미'를 하고 있습니다. 용, 호랑이, 독거미, 칼... 무시무시한 그림이나 복수, 필살, 일심 등 원한이나 독기 풍기는 글을 새겨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신은 보는 사람들을 겁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애벌레들의 안상문이나 경악색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는 "돈이나 권력이 있든지 그렇지 못하면 하다못해 주먹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하되 정곡을 찌른 달관을 이 서투른 문신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사회의 거대한 메커니즘 속에서, 지구의 자전처럼 개인이 느낄 수 없는 엄청난 '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종이 호랑이'만도 못한 이 서투른 문신이 이들의 알몸을 어떻게 지켜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불행한 사람들의 가난한 그림입니다.
하루의 징역을 끝내고 곤히 잠들어 고르게 숨쉬는 가슴 위에 사천왕보다 험상궂은 얼굴로 눈떠 있는 짐승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한 마리의 짐승을 배워햐 하는 그 혹독한 처지가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 되어 가득히 차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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