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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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3

잡테리어 목공샘 2018. 4. 17.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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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명과 형기
계수님께

죄명은 그 사람의 '질'을, 형기는 그 질의 '정도'를 상징합니다.

'관계'는 '관점'을 결정합니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경우에는 이 바라본다는 행위는 그를 알려는 태도가 못됩니다.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

과거에 투영된 현재
부모님께

역사현상은 그것이 개인이든 사건이든, 하나의 단절된 객체로 한정할 수 없으며, 그것에 선행하는 여러 가지의 계기에서부터 그것의 발전, 변용의 가능한 방향에 긍하는 총합과정의 한 부문으로서 파악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더욱이 '과거'란 완성되고 끝마쳐진 어떤 불변의 것이 아니며, 반대로 역사인식은 언제나 현재의 갈등과 관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과거에 투영된 현재'이며 그런 의미에서 계속 새롭게 씌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증오는 사랑의 방법
계수님께

불편부당이나 중립을 흔히 높은 덕목으로 치기도 하지만, 바깥 사회와 같은 복잡한 정치적 장치 속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단순화된 징역 모델에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싸울 때의 '중립'이란 실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보다 더욱 교묘한 편당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으려는 심리적 충동도, 실은 반대편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심약함'이 아니면, 아무에게나 영합하려는 '화냥끼'가 아니면, 소년들이 갖는 한낱 '감상적 이상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해야 햡니다. 이것은 입장과 정견이 분명한 실한 사랑의 교감이 없습니다. 사랑은 분별이기 때문에 맹목적이지 않으며, 사랑은 희생이기 때문에 무한할 수도 없습니다.
징역을 살 만큼 살아본 사람의 경우가 아마 가장 철저하리라고 생각되는데 '마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허망한 사랑을 가지고 있거나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증오에 대하여 알 만큼 알고 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증오는 그것이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빗속에 서고 싶은 충동
계수님께

이번 여름은 소나가가 잦아 그때마다 빗속에 서고 싶은 충동을 다스리지 못해 마음이 빗나가기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소나기가 씻어가는 것이 비단 더위만이 아니라 지붕의, 골목의, 그리고 우리들 의식 속의 훨씬 더 많은 잔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람한 자연의 역사는 비록 빗속에 서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를 청신한 창조의 새벽으로 데려다주는 것임을 알겠습니다.
장승처럼 선 자리에 발목 박고 세월보다 먼저 빛바래어가는 우리들에겐 수시로 우리의 얼굴을 두들겨줄 여름 소나기의 질타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릎 칠 공감을 구하여 깊은 밤 살아 있는 책장을 넘기기도 하고, 같은 아픔을 가지기 위하여 좁은 우산을 버리고 함께 비를 맞기도 하며, 어줍잖은 타산의 돌 한 개라도 소중히 간수하면서.... 우리의 내부에서 우리를 질타해줄 한 그릇의 소나기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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