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지속가능한 지구살이를 위해 재활용/친환경/ DIY 공부 중

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5

잡테리어 목공샘 2018. 4. 21.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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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의 무게
형수님께

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여 '지'란 진리의 존재를 파악한 상태이고, '호'가 그 진리를 아직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한 상태로 보는 데에 비하여 '낙'은 그것을 완전히 터득하고 자기 것으로 삼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경지로 풀이되기도 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은 그 즐거움은 놀이이며, 궁리는 학습이고, 만들어내는 행위는 곧 노동이 됩니다. 이러한 생활 속의 즐거움이나 일거리와는 하등의 인연도 없이 칠판에 백묵으로 적어놓은 것이나 종이에 인쇄된 것을 '진리'라고 믿으라는 '요구'는 심하게 표현한다면 어른들의 폭력이라 해야 합니다. 이런 무리한 요구에 억눌려 자라지 못하는 무수한 가능성의 싹들을 생각하면 시험과 성적과 모범 등... 이러한 학교의 도덕적 규준이 만들어내는 품성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창의성 있고 개성 있는 어린이, 굵은 뼈대를 가진 어린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불량학생이란 흉한 이름을 붙여 일찌감치 엘리트 코스에서 밀어내 버리고, 선생님 말 잘 듣고 고분고분 잘 암기하는 수신형의 편편약골을 기르고 기리어 사회의 동량의 자리를 맡긴다면 평화로운 시기는 또 그렇다 치더라도 역사의 격동기에 조국을 지켜나가기에는 아무래도 미덥지 못하다 생각됩니다. 저는 훨씬 나중에야 그 '우등'의 본질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열등생으로의 대전락(?)을 경험하게 되지만, 어린 시절 우등생이라는 명예(?)가 어쩐지 다른 친구들로부터 나를 소외시키는 것 같아 일부러 심한 장난을 저질러 선생님의 꾸중을 자초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러한 장난들은 우등생과 열등생 사이를 넘나들던 정신적 갈등의 표현이었음을 지금에야 깨닫게 됩니다.

소년을 보살피는 일은 천체망원경의 렌즈를 닦는 일처럼 별과 우주와 미래를 바라보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과거의 추체험(전문)
계수님께

'인체의 해부는 원숭이의 신체구조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것은 역사 연구에 있어서 유명한 현재주의의 '표제'입니다. 현재의 관심과 갈등을 과거에 투영함으로써 일단 완성되고 끝마쳐진 것으로 치부되었던 과거를 그 칠흑의 망각으로부터 현재의 갈등과 싸움의 현장으로 이끌어내자는 역사 인식의 능동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의 방법은 자주 지적되어 온 바와 같이 주관주의의 오류에 빠지기 쉽고 따라서 진실성이 유용성으로 흘러버릴 위험을 안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을 경계하고 있는 한, 우리는 이 현재주의의 정신으로부터 주체적 능동성이라는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며, 이러한 교훈은 비단 역사 연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평범한 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정돈함에 있어서도 훌륭한 생활철학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징역살이와 같이 과거가 무슨 '업'이 되어 현재의 모든 가능성을 덮어누르고 있는 경우, 이 인식에 있어서의 능동성은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를 띠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는 행위가 어쩌면 신대륙을 재발견하는 도로 같기도 하고, 자칫 노인들의 회고벽으로 격이 떨어질 우려도 없지 않으나 앞날을 겨냥하는 적극적 체계 속에서 이를 재조명하는 과거의 추체험은 과거를 새로이 발굴하고 종전의 의미를 뒤바꿔놓음으로써 단순한 온고의 의미를 넘어서 '자유'와 '해방'의 의미마저 띠게 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다시 체험하고 그 뜻을 파헤치다가도 일을 도리어 그르치는 예를 허다히 봅니다. 우리는 참회록이라는 지극히 겸손한 명칭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오만으로 가득 찬 저서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오만은 자신의 실패나 치부를 파헤치긴 하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중의 성취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조명적 장치로서의 성격을 떨쳐버리지 못함에서 오는 것으로, 이것은 결국 불행이나 실패에 대한 이해의 일회적이고 천박함에서 오는 오만-인생 그 자체에 대한 오만-이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 쪽에 마음을 너무 많이 할애함으로써 현재의 갈등과 쟁투가 그 전진적 몸부림을 멈추고 거꾸로 과거에로 도피해버리는 예를 많이 봅니다. 과거에로의 도피는 한마디로 패배이며, '패배가 주는 약간의 안식'에 귀의하여 과거에의 예종, 숙명론적 굴레를 스스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나는 이 숱한 문제들과 정면 대결하는 긴긴 겨울밤을 좋아합니다. 꽁꽁 얼어붙은 하늘을 치달리는 잡념을 다듬고 간추려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겪었던 하나하나의 일들과 만나고 헤어진 모든 사람들의 의미를 세세히 점검하는 겨울밤을 좋아합니다. 까맣게 잊어버렸던 일들을 건져내기도 하고, 사소한 일에 담겨 있는 의외로 큰 의미에 놀라기도 하고, 극히 개인적인 사건으로 알았던 일에서 넘치는 사회적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만나고 헤어진다는 일이 정반대의 의미로 남아 있는 경우도 없지 않아 새삼 놀람을 금치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에서 만나는 것은 매양 나 자신의 이러저러한 모습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러한 겨울밤의 사색은 손시린 겨울빨래처럼 마음내키지 않는 때도 있지만 이는 자기와의 대면의 시간이며, 자기 해방의 시간이기 때문에 소중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과거를 파헤치지 않고 어찌 그 완고한 정지를 일으켜 세울 수 있으며, 과거를 일으켜세워 걸리지 않고 어찌 그 중압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않고서 어찌 새로운 것으로 나아갈 수 있으랴 싶습니다.
지난번 집에 잠시 들렀을 때는 바쁘고 경황 없어서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말았습니다만 계수님과는 언젠가는 좋은 말동무가 되라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지에 쓰신 떡국도 머지않아 먹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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