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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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7

잡테리어 목공샘 2018. 3. 27.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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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나비
아버님, 어머님께

"꽃과 나비는 부모가 돌보지 않아도 저렇게 아름답게 자라지 않는냐."
어린 아들에게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졸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의 자애로 담뿍 적신 저는, 꽃보다 나비보다 더 아름답게 살아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버림과 키움
아버님께

10년, 저는 많은 것을 잃고, 또 많은 것을 버렸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은 서운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버린다는 것은 상추를 솎아내는, 더 큰 것을 키우는 손길이기도 할 것입니다.

두 개의 종소리(전문)
아버님께

새벽마다 저는 두 개의 종소리를 듣습니다. 새벽 4시쯤이면 어느 절에선가 범종소리가 울려오고 다시 한동안이 지나면 교회당의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나 이 두 종소리는 서로 커다란 차이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종이 높고 연속적인 금속성임에 비하여,범종은 쇠붙이 소리가 아닌 듯, 누구의 나직한 음성 같습니다. 교회종이 새벽의 정적을 휘저어놓는 틈입자라면, 꼭 스물아홉 맥박마다 한 번씩 울리는 범종은 '승고월하문'의 '고'처럼, 오히려 적막을 심화하는 것입니다. 빌딩의 숲 속 철제의 높은 종탑에서 뿌리듯이 흔드는 교회 종소리가 마치 반갑지 않은 사람의 노크 같음에 비하여, 이슬이 맺힌 산사 어디쯤에서 땅에 닿을 듯, 지심에 전하듯 울리는 범종소리는 산이 부르는 목소리라 하겠습니다. 교회 종소리의 여운속에는 플래시를 들고 손목시계를 보며 종을 치는 수위의 바쁜 동작이 보이는가 하면, 끊일 듯 끊일 듯하는 범종의 여운 속에는 부동의 수도자가 서 있습니다.
범종소리에 이끌려 도달한 사색과 정밀이 교회 종소리로 유리처럼 깨어지고 나면 저는 주섬주섬 생각의 파편을 주운 다음, 제3의 전혀 엉뚱한 소리-기상 나팔소리가 깨울 때까지 내쳐 자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달픈 수정들이 잠든 새벽녘, 이 두 개의 종소리 사이에 누워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다는 것은 작지만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불제자도 기독도도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믿는다'는 사고형식에는 도시 서툴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게도 사람을 믿는다거나 어떤 법칙을 믿는 등의 소위 '믿는다'는 사고양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의 믿음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인격이나 객관화된 경험에 대한 이해와 평가의 종합적 표현일 뿐 결코 '이해에 기초하지 않은 믿음'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와는 별개의 것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범종과 교회종에 대한 포폄이 저의 종교적 입장과는 인연이 먼 것이며 그렇다고 일시적인 호오나 감정의 경사에도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지금까지 저의 내부에 형성된 의식의 표출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두 개의 종소리 사이에 누워 저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을 몇 개의 종소리에 귀기울여봅니다. 외래문물의 와중에서 성장해 온 저의 세대의 의식 속에는 필시 꺼야 할 이질의 종소리들이 착종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대전교도소 수인 중에서 그 두 개의 종소리를 들은 수인은 몇이나 될까. 또 들었다면 이렇게 깊은 사색을 한 수인은 또 몇이나 될까. 선생님은 두 개의 종소리를 통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간명하게 대비한다. 종소리의 느낌부터 타종하는 모습까지 상상해 가면서. 선생님의 두 개의 종교에 대한 느낌은 나와 다르지 않다. 아마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밖으로만 나가는 기독교의 모습과, 성불을 위하여 자기 안으로만 들어가는 불교의 차이에서 오는 게 아닐까. 나도 내 안으로 들어가봐야 하는 데 그 안에 무엇을 있을지 두렵기만 하다. 선생님의 표현대로 '이질의 종소리들이 착종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매직펜과 붓(전문)
아버님께

오늘이 입추,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어젯밤에 폭우를 맞더니 정말 오늘부터는 가을로 접어들려는지 아침 햇살이 뜨겁지 않습니다.
우송해주신 먹과 화선지 그리고 아버님의 하서 모두 잘 받았습니다. 어머님께옵서도 안녕하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실 줄 믿습니다.
저는 주로 붓으로 글씨를 쓰고 있습니다만 가끔 '매직펜'으로 줄을 긋거나 글씨를 쓸 일이 생깁니다. 이 매직펜은 매직잉크가 든 작은 병을 병째 펜처럼 들고 사용하도록 만든 편리한 문방구입니다. 이것은 붓글씨와 달라 특별한 숙련이 요구되지 않으므로, 초보자가 따로 없습니다. 마치 피아노의 건반을 아무나 눌러도 정해진 음이 울리듯, 매직펜은 누가 긋더라도 정해진 너비대로 줄을 칠 수 있습니다. 먹을 갈거나 붓끝을 가누는 수고가 없어도 좋고, 필법의 수련 같은 귀찮은 노력은 더구나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휘발성이 높아 건조를 기다릴 것까지 없고 보면 가히 인스턴트 시대의 총아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편의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종이 위를 지날 때 내는 날카로운 마찰음-기계와 기계의 틈새에 끼인 문명의 비명 같은 소리가 좋지 않습니다. 달려들듯 다가오는 그 자극성의 냄새가 좋지 않습니다.
붓은 결코 소리내지 않습니다. 어머님의 약손같이 부드러운 감촉이, 수줍은 듯 은근한 그 묵향이, 묵의 깊이가 좋습니다. 추호처럼 가늘은 획에서 필관보다 굵은 글자에 이르기까지 흡사 피리소리처럼 이어지는 그 폭과 유연성이 좋습니다. 붓은 그 사용자에게 상당한 양의 노력과 수련을 요구하지만 그러기에 그만큼의 애책과 사랑을 갖게 해줍니다. 붓은 좀체 호락호락하지 않은 매운 지조의 선비 같습니다.
매직펜이 실용과 편의라는 서양적 사고의 산물이라면 붓은 동양의 정신을 담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의 벼룻집 속에는 이 둘이 공존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제가 소위 '동도서기'라는 절충의 논리를 수긍하는 뜻이 아닙니다.
절충이나 종합은 흔히 은폐와 호도의 다른 이름일 뿐,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는 그 사회, 그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객관적 제조건에 비추어, 비록 상당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주장이라 하더라도 그 경중, 선후를 준별하고 하나를 다른 하나에 종속시키는 실천적 파당성이 도리어 '시중'의 진의이며 중용의 본도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역시 붓을 선호하는 쪽입니다. 주로 도시에서 교육을 받아온 저에게 있어서 붓은 단순한 취미나 여기라는 공연한 사치로 이해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앞서의 두 개의 종소리(교회종과 범종)처럼 두 개의 필기구(선생님은 문방구라 표현하셨지만) 매직펜과 붓에 대한 사색이다. 하나는 서양적 이기의 총아, 다른 하나는 동양적 구도자의 그것이라고 보면 맞을까. 갑자기 붓글씨가 배우고 싶다.캘리그라피가 아닌...


짧은 1년, 긴 하루(전문)
아버님께

제가 편지를 올린 바로 그 날, 아버님의 하서 두 통을 받았습니다. 아버님의 '태백산 등반기'를 읽고 저희들은 아버님의 등산 실력에 경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해발 1,546미터의 망경봉을 4시간의 야간등반으로 오르셨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의 번뜩이는 젊음과 더불어 태백의 준령에 올라 동해의 일출을 굽어보시는 아버님의 정정하신 기력과 '젊음'이 일출인 듯 선연합니다. (내맘대로 필사-번뜩이는 젊은이들과 더불어 태백의 준령에 올라 동해바다를 굽어보시는 아버님의 정정한 기력과 '젊음'이 그곳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선연합니다.)
이곳의 저희들은 호연한 등반과는 대조적으로, 열리지 않는 방형의 작은 공간 속에서 내밀한 사색과 성찰의 깊은 계곡에 침좌하고 있는 투입니다. '1년은 짧고 하루는 긴 생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나날도 돌이켜보면 몇 년 전이 바로 엊그제같이 허전할 뿐, 무엇 하나 담긴 것이 없는 생활, 손아귀에 쥐면 한 줌도 안되는 솜사탕 부푼 구름같이, 생각하면 약소하기 짝이 없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비록 한 줌이 안된다 해도 그 속에 귀한 경험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끝내 '약소'할 수만은 없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그 속에 우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거개가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냉정한 반면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는 무척 관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의 실수에 있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 우여곡절, 불가피했던 여러 사정을 잘 알고 있음에 반하여, 타인의 그것에 대하여는 그 처지나 실수가 있기까지의 과정 전부에 대해 무지하거나 설령 알더라고 극히 일부밖에 이해하지 못하므로 자연 너그럽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징역 속의 동거는 타인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같은 방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꼬박 마주앉아서 심지어 상대방의 잠꼬대까지 들어가며 사는 생활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랜 동거인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성장과정, 관심, 호오, 기타 사소한 습관에 이르기까지 손바닥 보듯 할 뿐 아니라 하나하나의 측면들을 개별로서가 아니라 인간성이라는 전체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도시의 아스팔트 위 손 시린 악수 한두 번으로 사귀는 커피 몇 잔의 시민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과 노력으로 모든 것을 열어놓은 자기 속으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이 열려 있는 타인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타인을 자신만큼 알기에 이릅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자기와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은 차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 '차이'에 대한 이해 없이 타인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것이 될 수는 없으며, 그 사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 그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저희들은 이 실패자들의 군서지에서 수많은 타인을 만나고, 그들의 수많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가능성 속에 몸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 교도소 생활만이 다달을 수 있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싶다. '손 시린 악수 한두 번'을 넘어 마음 속 계산기를 두드려 가며 만나는 '지인'들 속에서 과연 이해는 하고 있는지, 아니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지만, 그렇다라고 자신하지 못하겠다. 무덤 속에서 걸어나와 꾸짖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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