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지속가능한 지구살이를 위해 재활용/친환경/ DIY 공부 중

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6

잡테리어 목공샘 2018. 3. 26. 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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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체온
계수님께

수인들은 늘 벽을 만납니다.
통근길의 시민이 'stop'을 만나듯, 사슴이 엽사를 만나듯, 수인들은 징역의 도처에서 늘 벽을 만나고 있습니다. 가련한 자유의 시간인 꿈속에서마저 벽을 만나고 마는 것입니다. 무수한 벽과 벽 사이, 운신도 어려운 각진 공간에서 우리는 부단히 사고의 벽을 헐고자 합니다. 생각의 지붕을 벗고자 합니다.

온기 한 점 없는 냉방에서 우리를 덮어준 것은 동료들의 체온이었습니다. 추운 사람들끼리 서로의 체온을 모으는 동안 우리는 냉방이 가르치는 '벗'의 의미를, 겨울이 가르치는 '이웃의 체온'을 조금씩 조금씩 이해해가는 것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부모님께

접견 때마다 애써 아픈 마음을 누르시고 담담하게 이야기하시는 아버님, 어머님의 그 각별하신 배려 앞에서 저는 훨씬 밝은 마음이 됩니다. 역사의 골목골목에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 어머니'가 흔히 강한 아들을 만들어 주는, 별처럼 반짝이는 이야기가 군데군데 살아 있습니다. 애써 지으시던 담담하신 모습, 그 속에 담긴 엄한 가르침을 저는 모르지 않습니다.

비행기와 속력
계수님께

하늘의 비행기가 속력에 의하여 떠 있음에서 알 수 있듯이, 생활에 지향과 속력이 없으면 생활의 제측면이 일관되게 정돈될 수 없음은 물론, 자신의 역량마저 금방 풍화되어 무력해지는 법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속도보다는 지향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또 마치 중요한 격언인 양 남들에게 하기도 하고. 그 말이 가지는 분명한 '지향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신영복 선생님의 위의 말씀은 '지향이 중요하다'는 말 뒤에 숨어 있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일정 수준 이상의 속력이 있어야 품고 있는 지향이 의미가 있을 터. 그동안 나도 모르는 지향을 찾아 먼 거리를 헤메어 온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한다. 조그만 지향이라도 한 발짝이라도 다가가기 위해서는 속도를 내자. 앉아서 무언가 이루어지길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인도와 예도
아버님께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저로서는 옛 선비들이 누리던 그 유유한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입장도 못되며, 그렇다고 자기의 모든 것을 들린 듯 바칠 만큼 예술에 대한 집념이나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제 자신의 자세가 확립되지 못하고, 아직은 어떤 애매한 가능성에 기댄 채 머뭇거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려 하기에 앞서, 붓을 잡는 자세를 성실히 함으로써 먼저 뜻과 품성을 닦는, 오히려 '먼 길'을 걸으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뜻과 품성이 비로소 훌륭한 글씨와 그림을 가능하게 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인도는 예도의 장엽을 뻗는 심근이 것을, 예도는 인도의 대하로 향하는 시내인 것을. 그리하여 최고의 예술작품은 결국 '훌륭한 인간', '훌륭한 역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봄볕 한 장 등에 지고
부모님께

창살 무늬진, 신문지 크기의 각진 봄볕 한 장 등에 지고 이윽고 앉자 있으면 봄은 흡사 정다운 어깨동무처럼 포근히 목을 두릅니다.

서도의 관계론(전문)
아버님께

제가 서도를 운위하다니 당구의 폐풍월 짝입니다만 엽서 위의 편언이고 보면 조리가 빈다고 허물이겠습니까.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개칠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독존하지 못하는 '반쪽'인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자 또는 그 다음다음 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 한 '행'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연'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와 노력들의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얻은 한폭의 글은, 획, 자, 행, 연 들이 대소, 강약, 태세, 지속, 농담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양보하며 실수와 결함을 감싸주며  간신히 이룩한 성취입니다. 그중 한 자, 한 획이라도 그 생김생김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르르 얼개가 전부 무너질 뻔한, 심지어 낙관까지도 전체 속에 융화되어 균형에 한 몫 참여하고 있을 정도의, 그 피가 통할 듯 농밀한 '상호연계'와 '통일' 속에서 이윽고 묵과 여백, 흑과 백이 이루는 대립과 조화, 그 '대립과 조화' 그것의 통일이 창출해내는 드높은 '질'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규격화된 자, 자, 자의 단순한 양적 집합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남남끼리의 그저 냉랭한 군서일 뿐 거기 어디 악수하고 싶은 얼굴 하나 있겠습니까.
유리창을 깨뜨린 잘못이 유리 한 장으로 보상될 수있다는 생각은, 사람의 수고가, 인정이 배제된 일정액의 화폐로 대상될 수 있다는 생각만큼이나 쓸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획과 획 간에, 자와 자 간에 붓을 세우듯이, 저는 묵을 갈 적마다 인과 인 간의 그 뜨거운 '연계' 위에 서고자 합니다.
춥다가 아직 덥기 전의, 4월도 한창 때, 좋은 시절입니다.
1977.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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