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지속가능한 지구살이를 위해 재활용/친환경/ DIY 공부 중

2018/04 17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7

창문과 문 형수님께 이번 이사 때 가장 두고 오기 아까웠던 것은 '창문'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능선과 오뉴월 보리밭 언덕이 내다보이는 창은 우리들의 메마른 시선을 적셔주는 맑은 샘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창문'보다는 역시 '문'이 더 낫습니다.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힘찬 실천의 현장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 앞에 조용히 서서 먼 곳에 착목하여 스스로의 생각을 여미는 창문이 귀중한 '명상의 양지'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결연히 문을 열고 온몸이 나아가는 진보 그 자체와는 구별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둠이 일깨우는 소리 계수님께 어둠은 새로운 소리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놀랍게도 나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어둠은 나 자신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캐어물..

독서일기/필사 2018.04.09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6

고난의 바닥에 한 톨 인정의 씨앗 아버님께 겨울 동안은 서로의 체온이 옆사람을 도와 혹한을 견디던 저희들이 이제 여름에는 자기의 체온으로 옆사람을 불 때는 형국이 되어 물것들의 등살에 더하여 당찮은 미움까지 만들어내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저께 밤중의 일이었습니다. 여태 없던 서늘한 바람기에 눈을 떴더니, 더위에 지친 동료를 위하여 방 가운데서 부채질하고 서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엄상은 정목을 가려내고 설중에 매화 있듯이 고난도 그 바닥에 한 톨 인정의 씨앗을 묻고 있는가 봅니다. 이러한 인정을 보지 못하고 지레 '미움'을 걱정함은 인간의 신성의 깊음에 대한 스스로의 단견외에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청의삭발승 형수님께 옛날에 수염이 길고 지혜 또한 깊은 어느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짙게..

독서일기/필사 2018.04.07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5

불꽃 계수님께 나한테 묻는다면 겨울의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불빛이라고 하겠습니다. 새까만 연탄구멍 저쪽의 아득한 곳에서부터 초롱초롱 눈을 뜨고 세차게 살아오르는 주홍의 불빛은 가히 겨울의 꽃이고 심동의 평화입니다. 천 년도 더 묵은, 검은 침묵을 깨뜨리고 서슬 푸른 불꽃을 펄럭이며 뜨겁게 불타오르는 한겨울의 연탄불은, 추위에 곧은 손을 불러모으고,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젖은 양말을 말리고... 그리고 이따금 겨울 창문을 열게 합니다. 봄싹 형수님께 15척 담은 봄도 넘기 어려운지 봄은 밖에 먼저 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나절의 봄나들이를 맞아 저마다 잠자던 감성의 눈을 크게 뜨고 봄을 들이마시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나는 들판을 기웃거리다가 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을 놀라움으로 깨달았다. 사람에게 봄기..

독서일기/필사 2018.04.06

2018-04-01 [만우절 감자심기]

참 오랜만에 농사일기를 쓴다. 블로그 자체도 오랜만이지만 유난히 추웠던 기나긴 지난 겨울 때문이리라. 춘천 고탄의 봄은 감자파종부터 시작된다. 아낙들은 집집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씨감자를 오리고, 남정네들은 감자밭에 퇴비 펴고 로터리를 치고 두둑을 만든다. 정식날짜를 순번을 매겨 일정을 잡으면 품앗이로 돌아가며 순차적으로 심어 가는 것이 고탄의 감자심는 법이다. 물론 이 법은 농사꾼들의 방법이고, 나같이 겨우 씨감자 한 박스 심는 게으른 농사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올해는 간벌목 공예용 나무판 주문까지 받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황량한 감자밭의 손짓에 애써 눈길을 피하고 있다가 거짓말처럼 하루 시간이 났다. 바로 '만우절' '오늘 하루에 동네 아낙들과 남정네들의 일을 모두 해치워야 한다...

농사일기 2018.04.03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4

세월의 아픈 채찍 계수님께 기상시간 전에 옆사람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뽑아 벽 기대어 앉으면 싸늘한 벽의 냉기가 나를 깨우기 시작합니다. 나에게는 이때가 하루의 가장 맑은 시간입니다. 겪은 일, 읽은 글, 만난 인정, 들은 사정.... 밤의 긴 터널 속에서 여과된 어제의 역사들이 내 생각의 서가에 가지런히 정돈되는 시간입니다. 침묵과 요설 계수님께 교도소의 문화는 우선 침묵의 문화입니다. 마음을 열지 않고, 과거를 열지 않고, 그리고 입마저 열지 않는, 침묵과 외부와의 거대한 벽이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쓸쓸히 차단하고 있습니다. 두드려도 응답없는 침통한 침묵이 15척 높은 울이 되어 그런대로 최소한의 자기를 간수해가고 있습니다. 교도소의 문화는 또한 요설의 문화입니다. 요설은 청중을 미아로 만드는 ..

독서일기/필사 2018.04.03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3

신발 한 켤레의 토지에 서서 계수님께 사과장수는 사과나무가 아니면서 사과를 팔고,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정직한 말을 파는 세로에서, 발파멱월, 강물을 헤쳐서 달을 찾고, 우산을 먼저 보고 비를 나중 보는 어리석음이 부끄러워지는 계절-남들의 세상에 세들어 살듯 낮게 살아온 사람들 틈바구니 신발 한 켤레의 토지에 서서 가을이면 먼저 어리석은 지혜의 껍질들을 낙엽처럼 떨고 싶습니다. 낮은 곳 형수님께 '푸른 과실이 햇빛을 마시고 제 속의 쓰고 신 물을 달고 향기로운 즙으로 만들 듯이' 저도 이 가을에는 하루하루의 아픈 경험들을 양지바른 생각의 지붕에 널어, 소중한 겨울의 양식으로 갈무리하려고 합니다. -'양지바른 생각의 지붕' 이 말은 '성찰'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겠지. 나에게도 그런 생각의 지붕이 있었으..

독서일기/필사 2018.04.02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2

창살 너머 하늘 형수님께 창살 때문에 더 먼 하늘에는 크고 흰 구름이 일요일의 구름답게 바쁠 것 하나 없이 쉬고 있습니다. 흙내(전문) 계수님께 15척 옥담으로 둘린 교도소의 땅은 흔히들 좌절과 고뇌로 얼룩져서 화분에 담긴 흙처럼 흙내가 없다고 합니다. 이번 여름 패연히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다가 문득 창문 가득히 물씬 풍기는 흙내에 깜짝 놀랐습니다. 2층에서 보는 빗줄기는 더욱 세차고 길어서 장대같이 땅에 박혀 있었고 창문 가득한 흙내는 그 장대 빗줄기를 타고 오르는-맑은 날 뭉게구름이 되려고 솟아오른 흙내였습니다. 지심의 깊음에 비하면 얼룩진 땅 한 켜야 종이 한 장 두께도 못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뱀을 죽이면 반드시 나무에 걸어두었습니다. 흙내를 맡으면 다시 살아나서 밤중에 이불 속으로 찾아온다..

독서일기/필사 201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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