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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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4

잡테리어 목공샘 2018. 4. 3.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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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아픈 채찍
계수님께

기상시간 전에 옆사람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뽑아 벽 기대어 앉으면 싸늘한 벽의 냉기가 나를 깨우기 시작합니다. 나에게는 이때가 하루의 가장 맑은 시간입니다.
겪은 일, 읽은 글, 만난 인정, 들은 사정.... 밤의 긴 터널 속에서 여과된 어제의 역사들이 내 생각의 서가에 가지런히 정돈되는 시간입니다.

침묵과 요설
계수님께

교도소의 문화는 우선 침묵의 문화입니다.
마음을 열지 않고, 과거를 열지 않고, 그리고 입마저 열지 않는, 침묵과 외부와의 거대한 벽이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쓸쓸히 차단하고 있습니다. 두드려도 응답없는 침통한 침묵이 15척 높은 울이 되어 그런대로 최소한의 자기를 간수해가고 있습니다.
교도소의 문화는 또한 요설의 문화입니다.
요설은 청중을 미아로 만드는 과장과 허구와 환상의 숲입니다. 그 울창한 요설의 숲 속에 누가 살고 있는지 좀체 알 수 없습니다. 숲 속에 흔히 짐승들이  사람을 피해 숨어살듯이 장광설은 부끄러운 자신을 숨기는 은신처이기도 합니다.
침묵과 요설은 정반대의 외모를 하고 있으면서도 똑같이 그 속의 우리를 한없이 피곤하게 하는 소외의 문화입니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의 침묵을 열고 요설을 걷어낼 수 있는 제3의 문화를 고집하고 있는 많지 않은 사람 속에 서고자 해왔습니다.
불신과 허구, 환상과 과장, 돌과 바람, 이 황량한 교도소의 문화는 그 바닥에 짙은 슬픔을 깔고 있기 때문이며, 슬픔은 그것을 땅 속에 묻는다 할지라도 '썩지 않는 고무신', '자라는 돌'이 되어 오래오래 엉겨붙는 아픔으로 남기 때문입니다.
제3의 문화는 침묵과 요설의 어중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믿습니다. 버리고 싶은 마음, 잊고 싶은 마음을 정갈히 씻어 볕에 너는 자기 완성의 힘든 길 위의 어디쯤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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