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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경작되는 것
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한 번도 보지 않은 부모를 만나는 것과 같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까닭도 바로 사랑은 생활을 통하여 익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또 형제를 선택하여 출생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사랑도 그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 사랑은 선택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사후에 서서히 경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처럼 쓸데없는 말은 없다. 사랑이 경작되기 이전이라면 그 말은 거짓말이며, 그 이후라면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 평범한 능력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 따라서 문화는 이러한 능력을 계발하여야 하며, 문명은 이를 손상함이 없어야 한다.
고독한 풍화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연관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 있어서의 생활이란 그저 시간의 경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물질의 운동양식이라면 나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바위처럼 풍화당하는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칭 옥살이라는 것은 대립과 투쟁, 억압과 반항이 가장 예리하게 표출되어 팽팽하게 긴장되고 있는 생활이다. 궁핍은 필요를 낳고 필요는 또 요구를 낳으며 그 요구가 관철되기 위하여는 크고 작은 투쟁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 판이다.
가장 불리하고 약한 입장에서 가장 필요불가결한 것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수인들을 강하게 만들어준다. 그리하여 다듬어진 용기와 인내와 지구력.... 이것이 곧 수인의 재산인 것이다.
불행은 대개 행복보다 오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울 뿐이다. 행복도 불행만큼 오래 계속된다면 그것 역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단상 메모
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에 보다 참된 의의가 있다.
퇴화한 집오리의 한유보다는 무익조의 비상하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이 훨씬 훌륭한 자세이다.
인간의 적응력, 그것은 행복의 요람인 동시에 용기의 무덤이다.
인내는 비겁한 자의 자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초목 같은 사람들
농촌 사람들은 리, 동 소비조합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이라도 거기서 구입하지 않고 대개 장날을 기다린다. 시골 사람들이 장날을 기다려 장을 보러 가는 것은 꼭 살 물건이 있어서거나 살 돈을 장만해서가 아니다. 그야말로 장을 '보러'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돈을 쥘 필요는 없다. 시골에서 아쉬운 것이 어찌 하나 둘일까마는 오랜 세월을 그렇게 가난하게 살아오는 동안 웬만한 필요쯤이야 으레 참을 줄 아는 숙명 같은 미덕(?)을 키워온 것이다. 그래서 장날이 오면 돈이 없어도 그리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장을 '보러'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새옷들을 꺼내 입고 고무신까지 걸레로 잘 닦아서 아침 일찍 길들을 나선다. 그래서는 고작 물이 진 생선 몇 마리를 들고 돌아오지만, 저마다 제법 푸짐한 견문들을 안고 돌아오는 것이다.
이 견문들이 오래오래 화제에 오르내리며 무수히 반추되는 동안에 그것은 시골의 '문화'가 되어간다. 이 화려한 견문으로 해서 자신들의 빈한한 처지를 서러워하는 사람도 없지만 그 처지를 개조하려는 사람도 없다. 싸고 좋은 물건이 많이 생산되어서 참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비록 자신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척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메마르고 자그마한 생활이지만 그들은 이것을 소처럼 되씹고 되씹어 반추함으로써 마치 흙내음처럼 결코 부패하지 않는 풋풋한 삶의 생기로 만들어 살아가는 것이다.
농촌 아이들은 참 많이 죽는다. 시골의 어머니들은 보통 여남은 명의 아이를 낳지만 그중 네댓 명 정도만 남고 다 죽는다. 약한 놈은 '일찌감치' 죽어 버리고 강한 놈만 살아서 커가는 것이다.
농촌에서는 강한 아이만이 어른이 될 수 있다. 살아남은 그 어른들을 보고 성내 사람들은 농촌 사람들이 무병하고 건강하다고 말한다. 맑은 공기에 산수, 일광이 좋아서 농촌 사람들은 무척 튼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골 어머니들이 흘린 그 숱한 눈물을 모르는 것이다.
농촌의 노인들이 도회지에 가면 전부 환자가 된다. 그것은 교통사고로 아스팔트 위에서 부상을 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골에서는 질병이 인내되는 데에 반하여 도회지에서는 치료되고 있기 때문이다.
농촌 사람들은 흡다 초목 같다. 어려서는 푸성귀를 솎아내듯 약한 놈들을 솎아버리고 늙어서는 수목처럼 모든 질환의 고통으로부터 감각의 문을 닫아버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독방에 앉아서
고독하다는 뜻은 한마디로 외롭다는 것, 즉 혼자라는 느낌이다. 이것은 하나의 '느낌'이다.
자신이 혼자임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반드시 타인이 없는 상태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갖는 감정이다.
혼자라는 느낌, 격리감이나 소외감이란 유대감의 상실이며, 유대감과 유대의식이 없다는 것은 '유대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독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어차피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분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회란 '모두살이'라 하듯이, 함께 더불어 사는 집단이다. 협동노동이 사회의 기초이다.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함께 만들어낸 생산물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 곧 사회의 '이유'이다. 생산과 분배는 사회관계의 실체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관계의 토대이다.
그러므로 고독의 문제는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의 소외문제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만들어내고 나누는 과정의 무엇이 사람들을 소외시키는가? 무엇이 모두살이를 '각살이'로 조각내는가? 조각조각으로 쪼개져서도 그 조각난 개개인으로 하여금 '흩어져' 살 수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 수많은 철학이 이것을 언급해왔음이 사실이다. 누가 그러한 질문을 나한테 던진다면 나는 아마 '사유'라는 답변을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대안의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계절..... 담장과 울타리, 공장의 사유, 지구의 사유, 불행의 사유, 출세의 사유, 숟갈의 사유...
개미나 꿀벌의 모두살이에는 없는 것이다. 신발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밤길의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
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한 번도 보지 않은 부모를 만나는 것과 같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까닭도 바로 사랑은 생활을 통하여 익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또 형제를 선택하여 출생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사랑도 그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 사랑은 선택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사후에 서서히 경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처럼 쓸데없는 말은 없다. 사랑이 경작되기 이전이라면 그 말은 거짓말이며, 그 이후라면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이 평범한 능력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 따라서 문화는 이러한 능력을 계발하여야 하며, 문명은 이를 손상함이 없어야 한다.
고독한 풍화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연관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 있어서의 생활이란 그저 시간의 경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물질의 운동양식이라면 나는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바위처럼 풍화당하는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칭 옥살이라는 것은 대립과 투쟁, 억압과 반항이 가장 예리하게 표출되어 팽팽하게 긴장되고 있는 생활이다. 궁핍은 필요를 낳고 필요는 또 요구를 낳으며 그 요구가 관철되기 위하여는 크고 작은 투쟁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 판이다.
가장 불리하고 약한 입장에서 가장 필요불가결한 것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수인들을 강하게 만들어준다. 그리하여 다듬어진 용기와 인내와 지구력.... 이것이 곧 수인의 재산인 것이다.
불행은 대개 행복보다 오래 계속된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울 뿐이다. 행복도 불행만큼 오래 계속된다면 그것 역시 고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단상 메모
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에 보다 참된 의의가 있다.
퇴화한 집오리의 한유보다는 무익조의 비상하려는 안타까운 몸부림이 훨씬 훌륭한 자세이다.
인간의 적응력, 그것은 행복의 요람인 동시에 용기의 무덤이다.
인내는 비겁한 자의 자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초목 같은 사람들
농촌 사람들은 리, 동 소비조합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이라도 거기서 구입하지 않고 대개 장날을 기다린다. 시골 사람들이 장날을 기다려 장을 보러 가는 것은 꼭 살 물건이 있어서거나 살 돈을 장만해서가 아니다. 그야말로 장을 '보러'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돈을 쥘 필요는 없다. 시골에서 아쉬운 것이 어찌 하나 둘일까마는 오랜 세월을 그렇게 가난하게 살아오는 동안 웬만한 필요쯤이야 으레 참을 줄 아는 숙명 같은 미덕(?)을 키워온 것이다. 그래서 장날이 오면 돈이 없어도 그리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장을 '보러'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새옷들을 꺼내 입고 고무신까지 걸레로 잘 닦아서 아침 일찍 길들을 나선다. 그래서는 고작 물이 진 생선 몇 마리를 들고 돌아오지만, 저마다 제법 푸짐한 견문들을 안고 돌아오는 것이다.
이 견문들이 오래오래 화제에 오르내리며 무수히 반추되는 동안에 그것은 시골의 '문화'가 되어간다. 이 화려한 견문으로 해서 자신들의 빈한한 처지를 서러워하는 사람도 없지만 그 처지를 개조하려는 사람도 없다. 싸고 좋은 물건이 많이 생산되어서 참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비록 자신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무척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메마르고 자그마한 생활이지만 그들은 이것을 소처럼 되씹고 되씹어 반추함으로써 마치 흙내음처럼 결코 부패하지 않는 풋풋한 삶의 생기로 만들어 살아가는 것이다.
농촌 아이들은 참 많이 죽는다. 시골의 어머니들은 보통 여남은 명의 아이를 낳지만 그중 네댓 명 정도만 남고 다 죽는다. 약한 놈은 '일찌감치' 죽어 버리고 강한 놈만 살아서 커가는 것이다.
농촌에서는 강한 아이만이 어른이 될 수 있다. 살아남은 그 어른들을 보고 성내 사람들은 농촌 사람들이 무병하고 건강하다고 말한다. 맑은 공기에 산수, 일광이 좋아서 농촌 사람들은 무척 튼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골 어머니들이 흘린 그 숱한 눈물을 모르는 것이다.
농촌의 노인들이 도회지에 가면 전부 환자가 된다. 그것은 교통사고로 아스팔트 위에서 부상을 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골에서는 질병이 인내되는 데에 반하여 도회지에서는 치료되고 있기 때문이다.
농촌 사람들은 흡다 초목 같다. 어려서는 푸성귀를 솎아내듯 약한 놈들을 솎아버리고 늙어서는 수목처럼 모든 질환의 고통으로부터 감각의 문을 닫아버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독방에 앉아서
고독하다는 뜻은 한마디로 외롭다는 것, 즉 혼자라는 느낌이다. 이것은 하나의 '느낌'이다.
자신이 혼자임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반드시 타인이 없는 상태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갖는 감정이다.
혼자라는 느낌, 격리감이나 소외감이란 유대감의 상실이며, 유대감과 유대의식이 없다는 것은 '유대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독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어차피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분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회란 '모두살이'라 하듯이, 함께 더불어 사는 집단이다. 협동노동이 사회의 기초이다.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함께 만들어낸 생산물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 곧 사회의 '이유'이다. 생산과 분배는 사회관계의 실체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관계의 토대이다.
그러므로 고독의 문제는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의 소외문제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만들어내고 나누는 과정의 무엇이 사람들을 소외시키는가? 무엇이 모두살이를 '각살이'로 조각내는가? 조각조각으로 쪼개져서도 그 조각난 개개인으로 하여금 '흩어져' 살 수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 수많은 철학이 이것을 언급해왔음이 사실이다. 누가 그러한 질문을 나한테 던진다면 나는 아마 '사유'라는 답변을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대안의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계절..... 담장과 울타리, 공장의 사유, 지구의 사유, 불행의 사유, 출세의 사유, 숟갈의 사유...
개미나 꿀벌의 모두살이에는 없는 것이다. 신발이 바뀐 줄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밤길의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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