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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114 중 배움은 맥락속에서 일어난다.(전문)

잡테리어 목공샘 2018. 3. 2.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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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맥락 속에서 일어난다.(민들레 114권 중)

. 홍원의



 맥락의 효용

 세상은 결코 간단한 공식 몇 가지로 묘사할 수 없다. 셀 수 없이 다양한 관계가 얽히고설켜 복잡한 세계를 이룬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일까. 우리 뇌는 복잡함을 이해하기 위해 '맥락'의 개념을 익혔다. 기계는 온전히 흉내 낼 수 없는 그것. 맥락이란 어떤 존재가 그가 속한 세계와 맺어왔고 또 맺어가는 관계의 총체를 뜻한다. 사람이 뭔가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이 맥락이다. 예컨데 '철수가 집을 나갔다'라는 문장의 의미를 정확히 해석하려면 그 배경을 알아야 한다. 엄마랑 싸웠는지, 친구가 불렀는지, 집에 불이 나서 탈출을 했는지.

맥락은 유연함을 제공한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비틀어낼 수 있는 유창함을. 우리가 유머를 구사하고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자유로이 말을 비틀 수 있는 건, 말이 표현하고자 하는 그 세계의 '맥락', 말과 글의 세계에서는 '문맥'이라고 부르는 것을 엮어나가기 때문이다. 한 마디 문장을 가지고도 수천 갈래로 연결을 지을 수 있으니 막힘없이 수다를 떨 수 있고, 말을 하다 막히면 유머나 허튼 소리를 해서라도 자신의 말을 이을 수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맥락이 단절된 지식을 아이들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애쓴다. 아직 자연의 본능이 살아 있는 아이들이 "방정식을 배워서 어디다 써요? 이거 알아서 뭐 해요?"라며 줄기차게 배경, 곧 맥락을 물어보아도 제대로 대답해주는 교사가 드물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기 때문이다. 장과 절로 구분해서 개념들을 죽 늘어놓은 교육과정에 애초 맥락이란 없으니까. 그렇게 배워서 교사가 된 사람들이 또 그렇게 가르친다. 무맥락의 악순환이다. 당장 점수로 연결되지 않는 맥락부터 쳐내는 훈련을 하고, 그래서 졸업할 때쯤에는 이 복잡한 세상에 수천 가지의 방식으로 맞설 능력이 거세된 모형 인간이 된다. 학교에서 영어를 십 년 배우고도 말 한마디 못하는 게 당연하다. 맥락 없이 배웠기 때문이다.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대량으로 필요한 산업사회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맥락을 아는 사람으로 자랄 필요가 없었다. 일을 시키는 소수만 맥락을 알고 있으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이미 많이 변했다. 시키는 대로만 해도 되는 일은 기계와 로봇이 대신하고 있다. 이제는 스스로 맥락을 갖추지 않으면 생존조차 어려워질 것이다. 지금처럼 학교에 의지해 뭔가가 될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쓸모없음의 쓸모있음

학교에서 흔히 듣는 말이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마"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눈치와 뉘앙스로 자주 체감한다. 그러나 쓸데없는 가설과 질문들, 그 쓸데없는 개념들의 맥락 속에서 정작 쓸모 있는 지식이 비로소 제자리를 잡는다. 진화에서 살아남지 못한 개체는 쓸모없지 않으며, 나중에 살아남을 개체를 위한 밑거름이 되어준다. 하루살이처럼 별 쓸모없지만 다채로운 생물군이 없으면 영장류의 진화가 일어나기 어렵다. 어른이 될수록 머리가 굳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어려운 이유는, '쓸모없지만 다양한 맥락'을 경험하지 않은 채 오랜 세월을 보냈기 때문인지 모른다(또는 학교를 너무 오래 다녔기 때문인지도).

컴퓨터 메모리에 정보를 집어넣는 일은 마치 창고에 상자를 쌓는 것과 같다. 상자끼리 아무 관련이 없어도 상관이 없다. 어떤 순서로 집어넣든, 넣는 대로 차곡차곡 다 들어간다. 그러나 사람이 정보를 받아들이는 문제가 되면, 집어넣으려는 해당 정보와 연관된 다른 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 '쓸모있는' A를 배우기 위해서는 A', A", A'", B, C, D... 이런 '쓸모없는' 정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사람의 뇌에서 A라는 정보는 그 '쓸모없는' 정보들과의 관계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A를 원하니까 A만 저장하겠다는 기계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정작 그 쓸모있는 A를 배우는 데조차 실패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이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친구랑 수다 떤 내용은 시간이 지나 그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도 "아 네가 그때 그랬지" 하면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다.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수학공식을 하나 배울 때도 마찬가지다. 쓸모없는 개념을 오히려 더 물어보면서 문맥의 토양을 비옥하게 일구면, 친구와 수다 떨 듯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관련 있는 것으로 배우면, 세월이 지나도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 기억이 추억이 되는 것이다.

목적 달성의 효율을 위해 목적 외의 문맥을 거세한다면, 그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전략으로 보더라도 미련한 일이다. 문맥이 거세된 목적은 관계 속에서 그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고, 장기적으로는 정작 그 목적에 이르는 길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길을 바꾸고 싶으면 물을 손으로 막지 말고 물길을 이루는 주변 자갈을 옮겨야 한다. 그게 물길의 맥락이니까. 자갈을 건드리는 아이에게 ", 물길을 바꾸랬지 누가 돌을 만지고 있으래?" 하면서 쓸데없는 짓 한다고 혼을 내는 게 어른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다. 물길을 맨손으로 틀어막으면 '당장은' 물길이 바뀔지 몰라도 손을 떼는 즉시 이전 흐름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학교에서 시험을 대비해 한다는 공부가 모두 이런 식이다. 뭔가 하는 척 부산을 떨지만 실제로 배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을 단기간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물길을 손으로 틀어막고, 플라스틱을 바다에 버리고, 종이를 함부로 쓴다. 자기 행동의 배경, 맥락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무장수가 숲의 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리면 단기적으로는 매우 이득이지만 한 세대 뒤의 맥락에서 보면 나무장사는 다 망한다. 자본주의적 발상으로도 매우 손해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단기로 고용해 기능만 뽑아 쓰고 버리는 회사 입장에서는 맥락이 거세된 인간을 사용하는 것이 이득이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반드시 손해가 나게 되어 있다. 우리 사회는 대체로 단기적인 효용에 집착해 장기적인 쓸모를 놓치고 있다. 회사야 잠깐 장사해서 돈 벌고 접으면 그만일지 몰라도 교육은 개인과 공동체의 운명이 걸려있는 장기적인 일이다.

 

진도의 함정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학습 진도를 설정하는 문제로 고민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도'라는 개념의 의미를 물어보자. 진도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일까? 상식상 '진도', 언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학에서도 어떤 전공수업을 3학점 이수했다는 식으로 성적증명서가 발급된다. 그러나 이건 '학습하는 사람'을 위한 관점이 아니라 '학습된 사람을 사용할 사람'을 위한 관점이다.

우리는 컴퓨터를 구입할 때 스펙을 본다. CPU가 얼마, RAM이 얼마... 마트에서 음료수를 사거나 약국에서 약을 살 때도 그 제품이 함유하고 있는 성분, 가치, 용량을 확인한다. '무엇을 배웠다, 머릿속에 무엇을 넣었다'라는 기록은 인적자원, 일종의 제품으로서 사회의 기준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용도이지, 자신이 자신을 보는 관점이 아니다. 우리가 평소 진도를 나간다는 말을 할 때의 맥락은 여기에 있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의 입장에서 '진도'를 나간다는 의미는 '무엇을 배우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궁금한가'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무엇을 배웠는가'에서는 학습자 바깥에 있는 어떤 정보를 학습자가 습득하는지가 기준이지만 '무엇이 궁금한가'에서는 학습자 안에서 생겨나는 의문을 기준으로 한다. 그럴 때 학습자가 연속으로 던지는 질문이 맥락을 유지하면서 물 흐르듯이 나아간다.

수학 공부를 한다면 흔히 '정답이 아니면 전부 틀리는' 답답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맥락을 형성하는 공부를 하려면 어떤 공식이 머리에 집어넣어진 상태를 위해 수학을 대하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드는 간단한 개념 하나를 하루 종일, 일주일, 한 달을 물으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진도는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 진도가 교사가 의도하는 대로, 교과서 목차대로 흘러가지는 않겠지만, 학습자에게 부담을 덜 주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은 자명하다. 정신적으로 부담이 덜 되면 당연히 오래 집중하는 게 가능하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던 경험처럼 말이다.

제곱근을 배우면서 수학적 논리를 전개하는 훈련을 깊이 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 삼각함수를 배워야지, 방정식 또는 로그를 배워야지 따위의 소위 '진도 나가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제곱근 하나만 여러 관점에서 물고 늘어지면서 조금만 비틀어 질문해보면 다항방정식, 무한소수, 함수, 지수, 로그 개념으로 흘러간다. 또 그렇게 도출된 것들에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던지면서 질문이 질문을 낳고 서로 엮이고 그렇게 맥락이 스스로 진화한다.

자라기 전에 자기가 자랄 모양을 정해서 자라는 소나무가 있는가. 사람마다 궁금한 지점은 제각기 다를 것이고, 그래서 질문들이 어디로 흘러갈지, 공부의 결과로 어떤 지식을 탑재하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그게 정상이다. 같은 소나무라도 제각각 다른 모양으로 자라나듯 학습자도 뛰놀면서 자신의 맥락을 갖춘 소나무로 성장하면 되는 것이지, 가지가 어디로 뻗었든 어디에 옹이가 생겼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소나무를 구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휜 가지와 옹이가 흠처럼 보이겠지만, 소나무 입장에서 그 비위를 굳이 맞춰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스스로 수학의 맥락을 만들어가게 되면 굳이 어려운 개념을 선행학습으로 억지로 탑재하지 않더라도 처음 만나는 복잡한 개념에도 질문을 던지고 해체해버리는, 말 그대로 수학을 자유로이 휘두르는 사람이 된다. 뭔가를 잘하는 수준에 이르는 사람은 나무가 자라듯 그렇게 성장한다. 기계는 없던 기능을  추가하면서 발전하지만, 생물은 자기에게 있는 기능을 강화하고 변형하면서 발전한다. 당연하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이다.

 

존재적 공부

수학으로 예를 들었지만,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제품으로 간주하고 기능을 추가하려 들지 말고 살아 있는 풀과 나무 같은 생물처럼 자라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다. 이제는 이걸 배우면 취직이 잘 되겠지, 저 자격증을 따놓으면 나중에 쓸모가 있겠지 하는 식의 '소유적인' 공부를 그만두고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어떻게 하면 더욱 정밀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경험한 바를 어떻게 하면 더욱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이런 공부를 일컬어 '존재적인' 공부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진짜 공부는 무지함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활동이다. 돈을 넣은 만큼 기대한 결과가 나오는 자판기가 아니라, 뭐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길이 없는 정글 탐험에 가깝다. 무지의 늪에서 헤메는 모습이 남들 보기엔 한심해 보일지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헤메는 사람이 정글의 생태에 대해 더 깊이 배우게 된다. 그럴 때 자신의 맥락이 만들어진다.

존재적인 공부는 뭔가를 '만나는' 것이다. 아직 안 만난 것을 만나는 것이고, 지금까지 대충 만난 것을 점점 더 깊이 만나는 것이다. 무력함과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본인은 여전히 불만족스럽겠지만 객관적으로는 계속 성장한다. 그것이 예술이며 만남이고, 공부의 근본이 지향하는 바, 존재가 자라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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