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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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필사

[떠남과 만남-구본형] 2장-6

잡테리어 목공샘 2018. 3. 12.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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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도 충무사
-아무도 없는 늦은 오후 이곳에 오면
한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전라남도의 섬을 돌다 보면 충무공의 숨결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섬과 섬이 만나는 좁은 길목에서는 으레 그의 전략적 안배가 치밀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나라에 왜군의 발이 디딜 수 없도록, 그리하여 어느 땅이든 그들의 잔인과 포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애쓴 집요하고 세밀한 배려가 없는 곳이 없다.

보리는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지고 있다. 바람이 보리밭 위를 지나면 파도처럼 물결치는 초록빛 흔들림이 여간 곱지 않다. 보리밭에 바람이 지나는 모습을 보지 않고 봄이 왔다고 하지 마라. 따가운 햇살에 뭉클뭉클 살아나는 붉은 흙들의 건강한 발기를 보지 못하고 봄이 왔다고 하지 마라.

충무사의 한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오후에 문 열리는 소리가 무겁다. 사당의 바로 앞 계단에 앉아 바다 쪽을 보았다. 낮은 담 밖으로 나무가 울창하다. 아마도 녹나무가 아닌가 싶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많이 흔들렸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고요하다. 해가 서산에 깊이 들고 햇빛이 잦아들자 그 고요가 주는 무게가 뜰에 가득하다. 사당을 찾기에 가장 적당한 시간은 아마 지금쯤인 것 같다. 5시가 조금 넘었다. 이끼 낀 돌계단에 앉아 잠시 충무공을 생각하였다.

여기 있는 나무들 중에 아주 오래된 놈들은 충무공이 아침에 일어나 해변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충무공의 시신이 배에 실려오는 곳을 보았을 것이다. 많은 장졸이 통곡하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고, 무덤이 파이고 관이 잠시 안치되는 것 또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태연하게 서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그때의 정황을 이야기해줄 만큼 우리는 아직 친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오후 5시에 이곳에 오면 충무공의 정기를 느낄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대가 그의 후예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루하루를 낭비하지 마라. 충무공은 싸움터에서도 하루가 지나는 것을 무심코 넘기지 않았다. 그 하루를 기록하여 그날이 그날로서 존재함을 잊지 않았다. 일이 닥쳐서야 어쩔 줄 몰라 하다 모욕을 당하는 일만큼은 피해라. 충무공은 이미 수년 전부터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준비하였다. 거북선을 만들고 선박을 축조한 것은 그가 전장에서 용감히 싸우다 죽는 것만을 최선으로 아는 일개 무장이 아니라 미래를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만드는 개적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만큼 확실한 승리는 없다. 그는 왜적과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어느 나라의 전사에도 이런 기록은 찾기 어렵다. 아마 없을 것이다.

봄날 늦은 오후 고금도 충무사에 해가 길게 드리운다. 마지막 배를 타고 마량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일어나기가 싫다. 조금만 더 앉아 있자. 막차도 막배도 아직은 있을 것이다.

-충무공에 대한 최대의 찬사. 경박하거나 요란하지 않다. 사내가 사내에게 느끼는 진실한 그리움이 있다. 빛나는 해전사에 대한 거룩한 경배. 그의 후예임을 감동하게 만드는 성찰도 좋다.

고금도 충무사 전경-사진:윤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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