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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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0

잡테리어 목공샘 2018. 4. 13.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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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사색(전문)
형수님께

해마다 가을이 되면 우리들은 추수라도 하듯이 한 해 동안 키워온 생각들을 거두어봅니다. 금년 가을도 여느 해나 다름없이 손에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공허한 마음은 뼈만 데리고 돌아온 '바다의 노인' 같습니다. 봄, 여름, 가을, 언제 한번 온몸으로 떠맡은 일 없이 그저 앉아서 생각만 달리는 일이 부질없기가 얼음 쪼아 구슬 만드는 격입니다. 그나마 내 쪽에서 벼리를 잡고 엮어간 일관된 사색이 아니라 그때 그때 부딪쳐오는 잡념잡사의 범위를 넘지 못하는 연습 같은 것들이고 보면 빈약한 추수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위에 정직한 최선을 다하지 못한 후회까지 더한다면 이제 문 닫고 앉아 봄을 기다려야 할 겨울이 더 길고 추운 계절로만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숱한 가을을 보내고 맞는 동안 가을에 갖는 우리의 회한이 결코 회한으로만 끝나지 않음을 압니다. 풍요보다는 궁핍이, 기쁨보다는 아픔이 우리를 삶의 진상에 맞세워주는 법이며, 삶의 진상은 다시 위대한 대립물이 되어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도록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일견 비정한 듯하나, 빈약한 추수에도 아랑곳없이 스스로를 간추려보게 하는 용기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가을에 흔히 사람들은 낙엽을 긁어모아 불사르고 그 재를 뿌리짬에 묻어줍니다. 이것은 새로운 나무의 식목이 아니라 이미 있는 나무를 북돋우는 시비입니다. 가을의 사색도 이와 같아서 그것은 새로운 것을 획득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다짐하고 챙기는 '약속의 이행' 입니다.
이 평범한 일상의 약속들이 다짐되고 이행된 다음, 나중에야 비로소 욕심이 충족되더라도 되는 것이 응당한 순서이리라 생각됩니다. 가을에 갖는 우리들의 공허한 마음이란 기실 조급한 욕심이 만들어놓은 엉뚱한 것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혹시나 잊고 있는 약속들을 찾아서 거두는 조용한 추수의 사려 깊음은 시내에 놓인 징검돌이 되어 이곳의 우리들로 하여금 섣달 냇물같이 차가운 징역을 건네줍니다.
엄마의 자리, 아내의 자리, 며느리의 자리, 형수의 자리.... 숱한 자리마다 올 가을에 큼직큼직한 수확 있으시기 바랍니다.

아내와 어머니
어머님께

함께 징역사는 사람들 중에는 그 처가 '고무신 거꾸로 신고' 가버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런가 하면 상당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짧지 않은 연월을 옥바라지 해가며 기다리는 처도 없지 않습니다. 이 경우 떠나가버리는 처를 악처라 하고 기다리는 처를 열녀(?)라 하여 OX 문제의 해답을 적듯 쉽게 단정해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곳 벽촌 사람들은 기다리는 처를 칭찬하기는 해도 떠나가는 처를 욕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떠남과 기다림이 결국은 당자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마음'을 탓하기에 앞서 그런 마음이 되기까지의 사연을 먼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가에 남아 있는 사람, 친정에 돌아가 얹혀 사는 사람, 의지가지 없어 술집에라도 나가 벌어야 하는 사람... 그 처지의 딱함도 한결같이 않습니다. 개중에는 마음마저 부지할 수 없을 정도의 혹독한 처지에 놓인 사람도 허다합니다. 그 처지가 먼저이고 그 마음이 나중이고 보면 마음은 크게는 그 처지에 따라 좌우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징역 간 남편에 대한 신뢰와 향념의 정도에도 그 마음이 좌우됨을 봅니다. 이 신뢰와 향념은 비록 죄지은 사람이기는 하나 그 사람됨에 대한 아내 나름의 평가이며, 삶을, 더욱이 힘든 삶을 마주 들어봄으로써만이 감지할 수 있는 가장 적실한 이해이며 인간학입니다.
떠나가는 처를 쉬이 탓하지 못하는 까닭은 이처럼 그 아내의 처지와 그 남편의 사람됨을 빼고 나면 그 아내가 책임져야 할 '마음'이란 기실 얼마 되지 않는 한 줌의 '인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정이란 것도 사람의 도리이고 보면 함부로 업수이 보아넘길 것이 아님을 물론입니다. 그러기에 고무신 거꾸로 신고 가버린 처를 일단은 자책과 함께 이해는 하면서도 그 매정함을 삭이지 못해 오래오래 서운해 하는가 봅니다.
처의 경우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음에 비하여 '어머니'의 경우는 태산부동 변함이 없습니다. 못난 자식일수록 모정은 더욱 간절하여 세상의 이목도, 법의 단죄도 개의치 않습니다. 심지어는 개가해간 어머니의 경우도 새 남편 알게 모르게 접견 와서 자식을 탓하기에 앞서 먼저 당신을 탓하며 옷고름 적시는 일도 더러 있습니다. 처와 어머니는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여자의 두 얼굴이지만 처는 바로 이 점에서 아직도 어머니의 어린 모습니다. 모야천지. 어머님의 마음은 언제나 열려 있는 하늘입니다.
불안한 처 대신 제게 태산 같은 어머님이 계시다는 것은 평소에는 잊고 있는 마음 든든한 행복입니다. 겨울밤에 잠깐 잠이 깰 때에도 등불처럼 켜져 있는 어머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흡사 어릴 때 어머님의 곁에서 재봉틀소리에 잠든 듯 마음이 따스해집니다. 지금은 어머님께서도 연로하시어 재봉틀 앞에 앉으실 일도 없으시고 저도 또한 어머님을 멀리 떠나 그 맑은 재봉틍소리 들을 수 없습니다만 저는 가끔 수돗물소리나, 호남선 밤차소리에 문득문득 어머님의 그 재봉틀소리를 깨닫곤 합니다.
한 해가 저무는 새밑쯤이면 더욱 심상해 하시는 어머님께 오늘은 고담 하나 들려드리며 세모의 인사에 대하려 합니다.
옛날 어느 시아버지가 있었는데 끼니 때마다 눈썹 가지런히 제미하여 밥상 올리는 며느리가 하도 예뻐서 어느날 그만 망령되이 쪽, 하고 며느리의 젖을 빨고 말았습니다. 혼비백산 버선발로 뛰쳐나온 며느리가 제 서방에게 이 변고를 울음 반 말 반으로 토설하였습니다. 분기탱천한 서방이 사랑문을 열어젖히고 아버지께 삿대질로 호통인즉 "남의 마누라 젖을 빨다니 이 무슨 망녕입니까!". 아버지 왈 "너는 이놈아, 내 마누라 젖을 안 빨았단 말이냐!" 되레 호통이었답니다.

세월의 흔적이 주는 의미
형수님께

사람은 나무와 달라서 나이를 더한다고 해서 그저 굵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젊음이 신선함을 항상 보증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노'가 원숙이, '소'가 청신함이 되고 안되고는 그 연월을 안받침하고 있는 체험과 사색의 갈무리 여하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겨울 새벽의 기상 나팔
계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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