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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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18

잡테리어 목공샘 2018. 4. 10.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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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파도를 만나듯
아버님께

"고요히 앉아 아무 일 않아도 봄은 오고 풀잎은 저절로 자란다"는 선승의 유유자적한 달관도 없지 않습니다만, 저만치 뜨거운 염천 아래 많은 사람들의 수고로운 일터를 두고도 창백한 손으로 한갖되이 방안에 앉아 있다는 것은 비록 그것이 징역의 소치라 하더라도 결국 거대한 소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새의 울음소리가 그 이전의 정적 없이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저는 이 범상히 넘길 수 없는 소외의 시절을, 오거서의 지식이나, 이미 문제에서 화제의 차원으로 떨어진 철늦은 경험들의 취집에 머물지 않고, 이러한 것들을 싸안고 훌쩍 뛰어넘는 이른바 '전인적 체득'과 '양묵'에 마음 바치고 싶습니다.
팽이가 가장 꼿꼿이 선 때를 일컬어 졸고 있다고 하며, 시낵물이 담을 이루어 멎을 때 문득 소리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선한 것을 향하여 부단히 마음을 열어두는 내성과 공감의 고요함인 동시에 자기 개조의 숨가쁜 쟁투와 역동을 속 깊이 담고 있음이라 생각됩니다. 알프스에서 바람을, 성하에 신록을, 그리고 바다에서 이랑 높은 파도를 만난다는 것은 무엇 하나 거스르지 않는 합자연의 순리라 믿습니다.

환동(전문)
아버님께

5월 24일부 및 5월 30일부 하서와 함께 서전록, 옥당지, 평론집 모두 잘 받았습니다.
아버님의 자상하신 옥바라지에 비해 이렇다 할 진척이 없는 제 자신이 새삼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나 이 부끄러움이 때로는 다음의 정진을 위한 한 알의 작은 씨앗이 되기도 한다는 것으로 자위하려 합니다.
여의치 못한 환경에서 글씨 쓰는 저희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차마 발길을 끊지 못하게 하는지 정향 선생님께서는 신도안 그 먼 길을 마다 않으시고 벌써 넉 달째 와주십니다.
정향 선생님의 행초서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글씨가 무르익으면 어린아이의 서투른 글씨로 '환동'한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아무렇게나 쓴 것같이 서툴고 어수룩하여 처음 대하는 사람들을 잠시 당황케 합니다. 그러나 이윽고 바라보면 피갈회옥 장교어졸, 일견 어수룩한 듯하면서도 그 속에 범상치 않은 기교와 법도, 그리고 엄정한 중봉이 뼈대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멋이나 미에 대한 통념을 시원하게 벗어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대범함이 거기 있습니다. 아무리 작게 쓴 글씨라도 큼직하게 느껴지는 넉넉함이라든가 조금도 태를 부리지 않고 여하한 작의도 비치지 않는 담백한 풍은 쉬이 흉내낼 수 없는 경지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물이 차서 자연히 넘듯 더디게 더디게 이루어지는 천연함이며, 속이 무르익은 다음에야 겨우 빰에 빛이 내비치는 실과 같아서 오랜 풍상을 겪은 이끼 낀 세월이나 만들어낼 수 있는 유원함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글씨로써 배워서 될 일이 아니라, 사물과 안생에 대한 견해 자체가 담담하고 원숙한 관조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결국, 글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이며 도의 가지에 열리는 수확이 아니라, 도의 뿌리에 스미는 거름 같은 것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은 모난 감정에 부대끼고 집념의 응어리를 삭이지 못하고 있는 저에게 정향 선생님의 어수룩한 행초서가 깨우쳐준 것은 분명 서도 그 자체를 훨씬 넘어서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욕설의 리얼리즘(전문)
계수님께

교도서의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욕설'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우리는 실로 흐드러진 욕설의 잔치 속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저도 징역 초기에는 욕설을 듣는 방법이 너무 고지식하여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곧이곧대로 상상하다가 어처구니 없는 궁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일쑤였습니다만 지금은 그 방면에서도 어느덧 이력이 나서 한 알의 당의정을 삼키듯 '이순'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겠습니다.
욕설은 어떤 비상한 감정이 인내력의 한계를 넘어 밖으로 돌출하는, 이를테면 불만이나 스트레스의 가장 싸고 '후진' 해소방법이라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과가 먼저 있고 사과라는 말이 나중에 생기듯이 욕설로 표현될 만한 감정이나 대상이 먼저 있음이 사실입니다. 징역의 현장인 이곳이 곧 욕설의 산지이며 욕설의 시장인 까닭도 그런 데에 연유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욕설은 이미 욕설이 아닙니다. 기쁨이나 반가움마저도 일단 욕설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경우는 그 감정의 비상함이 역설적으로 강조되는 시적 효과를 얻게 되는데 이것은 반가운 인사를 욕설로 대신해오던 서민들의 전통에 오래전부터 있어온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욕설이나 은어에 담겨 있는 뛰어난 언어감각에 탄복해오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 멋지게 들어맞는 비유나 풍자라든가, 극단적인 표현에 치우친 방만한 것이 아니라 약간 못미치는 듯한 선에서 용케 억제됨으로써 오히려 예리하고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것 등은 그것 자체로서 하나의 훌륭한 작품입니다.
'사물'과, 여러 개의 사물이 연계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사건과, 여러 개의 사건이 연계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사태' 등으로 상황을 카테고리로 구분한다면, 욕설은 대체로 높은 단계인 '사건' 또는 '사태'에 관한 개념화이며 이 개념의 예술적(?) 형상화 작업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고도의 의식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대상에 대한 사실적 인식을 기초로 하면서 예리한 풍자와 골계의 구조를 갖는 욕설에서, 인텔리들의 추상적 언어유희와은 확연히 구별되는, 적나라한 리얼리즘을 발견합니다. 뿐만 아니라 욕설에 동원되는 화재와 비유로부터 시세와 인정, 풍물에 대한 뜸든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매우 귀중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버섯이 아무리 곱다 한들 화분에 떠서 기르지 않듯이 욕설이 그 속에 아무리 뛰어난 예능을 담고 있다 한들 그것은 기실 응달의 산물이며 불행의 언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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