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지속가능한 지구살이를 위해 재활용/친환경/ DIY 공부 중

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9

잡테리어 목공샘 2018. 3. 29.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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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우상
아버님께

최후의 한 잎마저 떨어버린 겨울의 수목이 그 근간만으로 뚜렷이 바람 속에 서고, 모든 형태의 소유와 의상을 벗어버린 징역살이는 마치 물신성이 척결된 논리처럼 우리의 사고를 간단명료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겨울에는 자칫하면 주변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 제 한 몸의 문제에 문 닫고 들어앉아 칩거해버릴 위험도 없지 않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소유욕이며 추락입니다. 그러므로 겨울이 돌아오면 스스로 문을 열고 북풍 속에 섬으로써만이 '동굴의 우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손님
아버님께

모든아이들에게 있어서 손님은, 어른들의 자상하지 않은 대꾸로 인하여 더욱 궁금해진 그 미지의 손님은 어린이들이 최초로 갖게 되는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며, 어린아이들의 소왕국을 온통 휘저어놓는 '걸리버'의 상륙 같은 것입니다.
닫혀 있던 일상의 울타리가 열리며, 부산한 준비와 장만, 어른들의 상의 그리고 술렁이는 소문, 그리하여 답습과 안일의 때묻은 자리에 급속히 충만되는 '새로움'과 '활기'. 이것은 어른이 되어 굳어진 모든 가슴에까지 메아리 긴 감동으로 남는 것입니다.
모든 아이들에게 있어서 손님은 동경과 경이, '새로운 개안'의 순간이 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 우리집 아이들이 누군가만 오면 흥분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다. 뭔가 설명되지 않는 낮선 에너지가 나온다. 새로운 사람이 오면. 쑥스러워 하기도 하고, 경계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어떤 이에게는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로 친근하게 다가서지만, 별로 살갑지 않은 사람에게는 슬슬 눈치만 본다. 친소관계, 본인에게 다정한지 안그런지 직감적으로 안다.
징역살이 10여년에 어린이의 그것에까지 통찰이 이루어지는구나.

인디언의 편지
아버님께

"당신(백인)들은 어떻게 하늘을, 땅의 체온을 매매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땅을 팔지 않겠다면 당신들은 총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그러나 신성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은 기실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갓난아기가 엄마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사랑하듯 우리는 땅을 사랑합니다."
어머니를 팔 수 없다고 하는 이 인디언의 생각을, 사유와 매매와 소비의 대상으로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백인들의 사고방식과 나란히 놓을 때 거기 '문명'의 치부가 선연히 드러납니다.
또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땅으로부터 자기들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나 가져가버리는 백인들은 (땅에 대한) 이방인입니다."
"당신네 도시의 모습은 우리 인디언의 눈을 아프게 합니다."
자연을 적대적인 것으로, 또는 불편한 것, 미개한 것으로 파악하고 인간생활로부터 자연을 차단해온 성과가 문명의 내용이고, 차단된 자연으로부터의 거리가 문명의 척도가 되는 '도시의 물리'. 철근 콘크리트의 벽과 벽 사이에서 없어도 되는 물건을 생산하기에 여념이 없는, 욕망과 갈증의 생산에 여념이 없는, 생산할수록 더욱 궁핍을 느끼게 하는 '문명의 역리'에 대하여, 야만과 미개의 대명사처럼 되어온 한 인디언의 편지가 이처럼 통렬한 문명비평이 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문명과 야만의 의미를 다시 물어야 옳다고 생각됩니다. 편지의 후예들은 지금쯤 그들의 흙내와 바람마저 잃고 도시의 어느 외곽에서 오염된 햇볕 한 조각 입지 못한 채 백인들이 만들어낸 문명(?)의 어떤 것을 분배받고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저는 이 짤막한 편지를 읽으며 저의 세계관 속에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식민지적 잔재가 부끄러웠습니다. 서구적인 것을 보편적인 원리로 수긍하고 우리의 것은 항상 특수한 것, 우연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사고의 식민성'은 우리들의 가슴에 아직도 자국 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쌀을 얻기 위해서는 벼를 심어야
아버님께

목적과 수단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로 파악하고, 목적에 이르는 첩경이나 능률적인 방편을 찾기에 연연하지 않고, 비록 높은 벼랑일지라도 마주 대하고 서는 그 대결의 의지는 그 막힌 듯한 우직함이 벌써 하나의 훌륭한 건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땅에 넘어진 사람은 허공을 붙들고 일어날 수는 없고 어차피 땅을 짚고 일어설 수밖에 없듯" 지족과 평정을 얻기 위하여 다름아닌 지족과 평정을 닦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굵고 큼직한 사고야말로 그 속에 가장 견고한 건강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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