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지속가능한 지구살이를 위해 재활용/친환경/ DIY 공부 중

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31

잡테리어 목공샘 2018. 5. 16.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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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의 지혜
형수님께

겨울추위는 이처럼 역경에서 발휘되는 강한 생명력을 확인하고 신뢰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겨울 추위는 몸을 차게 하는 대신 생각을 맑게 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여름보다 겨울을 선호합니다. 다른 계절 동안 자잘한 감정에 부대끼거나 신변잡사에 얽매여 있던 생각들이 드높은 정신 세계로 시원하게 정돈되고 고양되는 것도 필경 겨울에 서슬져 있는 이 추위 때문이라 믿습니다. 추위는 흡사 '가난'처럼 불편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불편은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땜통 미싱사
계수님께

두 줄로 길게 늘어선 미싱대의 한 자리를 차고 앉아서 정신 없이 미싱을 밟다보면 마치 평화시장의 피복공장에 앉아 있는 듯한 연대감이 가슴 뿌듯하게 합니다. 작업이 종료되면 잔업식으로 나오는 뜨끈한 수제비 한 그릇씩 받아서 시장골목 좌판 같은 긴 식대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먹는 풍경과 수제비 맛은 하루의 노동을 끝낸 해방감을 한껏 증폭해줍니다.
연일 계속되는 잔업으로 피곤도 하고 시간도 없어 볼 책이 많이 밀려 있습니다만 저로서는 책 속에는 없는, 이를테면 세상의 뼈대를 접해보는 경험을 하는 느낌입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작업이 끝날 무렵이면 다사했던 병인년도 저물게 됩니다. 해마다 세모가 되면 십수년 동안 변함없이 보살펴주신 여러 사람들의 수고와 옥바라지를 돌이켜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고에 값할 만한 무엇을 키워왔는가, 또 이러한 수고에 값하기 위하여 어디에 자신을 세워야 할 것인가를 자문하게 됩니다. 세모는 좀더 깊은 고민을 요구하는 제5의 계절인지도 모릅니다.

설날에
아버님께

오늘은 구정입니다. 달력은 29일 밑에다 '민속의 날'이라 적어놓아서 설이란 이름에 담기어오던 민중적 정서와 얼이 빠져버리고 어딘가 박제가 된 듯 메마른 느낌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잔설도 비에 녹아 사라지고
형수님께

'사람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사업'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최고의 교실이라 생각됩니다.

밑바닥의 철학
계수님께

교도소의 천장 구석에 매달려 그 긴 겨울을 겪으면서도 새싹을 키워온 그 생명의 강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록빛 새싹을 입에 물고 있는 작은 마늘 한 쪽, 거기에 담긴 봄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봄이 아직 담을 못 넘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새 벌써 우리들의 곁에서 새로운 생명을 키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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