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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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9

잡테리어 목공샘 2018. 5. 4.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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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끓고 사는 세월
아버님께

밤새워 일하는 사람들이 켜놓은 불빛은 그렇지 않은 사람까지도 밝혀줍니다.

벼베기(전문)
계수님께

이번 가을에는 벼베기를 도우러 몇 차례의 바깥 나들이를 하였습니다. 교도소 논에 이틀, 대민지원으로 하루, 도합 사흘간의 가을일을 한 셈입니다. 오늘은 그때의 낙수 몇 가지를 적어봅니다.
사회참관이나 외부작업을 하러 교도소의 육중한 철문을 나설 때 우리들이 습관적으로 갖는 심정은, 이것은 진짜 출소가 아니라는 다짐입니다. 혹시나 감상에 빠지기 쉬운 자신의 연약한 마음을 스스로 경계함인가 합니다.
철문 나서면 맨 먼저 구봉산이 성큼 다가와 가슴에 안깁니다. 산은 역시 가슴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감방에서 쇠창살 사이로 보는 것은 '엿보는 것'이었나 봅니다.
1킬로미터는 좋이 뻗은 교도소 진입로 양편에는 때마침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가 환히 길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 꽃길을 달려온 77번 버스에는, 화사한 코스모스로 인해 더욱 어두워진 표정의 재소자 가족들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젠 가족들보고 접견 오지 말라고 해야지."
아마 그들 속에 자기 가족을 세워본 누군가의 자탄이 우리들 모두의 가슴에 못이 됩니다.
옷 벗어부치고 울적한 마음도 벗어부치고, 드는 낫 한자루씩 꼬나들고 논배미에 들어설 때의 대견함, 이것은 담 안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침 지난 여름 우리가 모를 낸 논에 붙었는데, 김매기도 그렇고, 피사리도 그렇고, 벼이삭도 그렇고... 곡식은 비료나 지력으로 자라는 게 아니라 일꾼 발자국소리 듣고 자란단 말이 적실합니다.
맨발로 논바닥에 들어서면 발가락 사이사이 흙이 솟아오릅니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흙힘입니다. 그러나 메뚜기 미꾸라지 죄다 떠나버리고 독한 농약에 찌들고 변색된 개구리 몇 마리 힘없이 달아날 뿐입니다. 헤식어 사위어가는 논입니다.
스무남은 명 중에 벼베기가 처음인 사람이 칠팔 명, 나도 그중의 하나이지만 미리 연습해두길 잘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도시의 뒷골목 사람쯤으로 여겼던 사람이 드는 솜씨를 보여줄 적에는 사회의 기반으로서의 농촌의 광대함이 든든하게 느껴집니다만, 젊은축일수록 낫질이 서투른 것을 보면 말로만 듣던 젊은이들의 이농과 그로 인한 농촌의 노화가 씁쓸히 실감됩니다.
똑같은 콩밥에 그 찬이지만 풀밭에 둘러앉아 먹는 맛이 또한 별미라 밥그릇이 대번에 비어버립니다. 점심 후에 짚단 베고 잠시 누었다 눈뜨니 고추잠자리 가슴에 쉬고 갑니다. 실로 오랜만에 누워서 창틀에 잘려 각지지 않은 넓은 하늘 마음껏 바라보았습니다.
사흘째 대민지원으로 나간 곳은 멀지 않은 진잠들이었는데, 남의 논 아홉마지기 부친다는 일흔넷의 가난한 할아버지의 논이었습니다. 논임자와 소출을 반타작하고 있는데, 농지세, 비료대, 농약값, 품값 전부 논 부치는 사람이 문다니 새참 국수 먹기도 민망할 정도로 어려운 살림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내 논배미서 일하는데 점심밥 못 내와서 면목없어 하고, 국수 날라온 아주머님은 직원들이 안된다 해서 막걸리 한 잔 못 드려 면목없어 하고, 우리는 솜씨 없는 터수에 국수만 축내어 면목없어 하고... 그러나 실로 오랜만에 받아본 한 사람씩의 일꾼 대접은 우리들이 그동안 잃어버린 채, 그리고 잊어버린 채 살아온 귀중한 것을 잠시나마 '회복'시켜주었다는 사실이, 올 가을에 거둔 커다란 수확의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2, 3일 논일로 벌써 고단하고 힘겨워지는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럽고 못나보였습니다만 나는 이번의 일로 해서, 남들은 나더러 일당 5천 원짜리 일꾼은 된다고 추어주지만, 당초 목표로 했듯이 가을들에서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훈련을 쌓은 것이 마음 흐뭇한 소득입니다.
비록 가을 들판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는 삶의 어느터전에 처한다 하더라도 자기 몫의 일에 대하여, 이웃의 힘겨운 일들에 대하려 결코 무력하거나 무심하지 않도록 자신의 역량과 심정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징역살이라 하여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여름 내내 청산을 이루어 녹색을 함께 해오던 나무들도 가을이 되고 서리 내리자 각기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단풍드는 나무, 낙엽지는 나무, 끝까지 녹색을 고집하는 나무... 질풍지경초, 바람이 눕는 풀과 곧추선 풀을 나누듯, 가을도 그가 거느린 추상으로 해서 나무를 나누는 결산의 계절입니다.

관계의 최고형태(전문)
형수님께

어느 일본인 기자가 쓴 '한국인'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젊은 동료 한 사람이 그 글의 진의를 물어와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 읽어본 것입니다만 제가 읽어본 일본의 몇몇 민주적인 지식인의 글에 비하면 그 격이 훨씬 떨어지는 3류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작은 엽서에서 그 글의 내용을 탓하려고도 않으며 또 그 글에 숨어 있는 필자의 민족적 오만이나 군국주의의 변태를 들추려고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그 글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서술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준 반면의 교사였습니다.
우리가 인식하거나 서술하려는 대상이 비교적 간단한 한 개의 사물이나 일 개인인 경우와는 달리 사회나 민족이나 한 시대를 대상으로 삼을 경우 그 어려움은 실로 막중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상이 이처럼 거대한 총체인 경우에는 필자의 관찰력이나 부지런함 따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필자의 문장력이나 감각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회, 역사 의식이나 철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과학적 사상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한, 아무리 많은 자료를 동원하고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구사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 꼴은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사고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바로 대상과 필자의 '관계'라 생각합니다. 대상과 필자가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는가에 따라서 얼마만큼의 깊이 있는 인식이, 또 어떠한 측면이 파악되는가가 결정됩니다. 이를테면 대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관계, 즉 구경하는 관계 그것은 한마디로 '관계 없음'입니다. 구경이란 말 대신 '관조'라는 좀더 운치 있는 어휘로 대치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관조만으로 시작되고 관조만으로서 완결되는 인식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대상과 자기가 애정의 젖줄로 연결되거나, 운명의 핏줄로 맺어짐이 없이, 즉 대상과 필자의 혼연한 육화 없이 대상을 인식, 서술할 수 있다는 환상, 이 환상이야말로 우리 시대에 범람하는 저널리즘이 양산해낸 특별한 형태의 오류이며 기만입니다. 저널리즘은 항상 제3의 입장, 중립의 불편부당이라는 허구의 위상을 의제하여 거기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대상과 관계를 가진 모든 입장을 불순하고 저급한 것으로 폄하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구경꾼, 진실의 낭비자로 철저히 소외시킵니다. 상품의 소비자, 스탠드 위의 관객, TV 앞의 시청자 등... 모든 형태의 구경꾼의 특징은 대상과 인식 주체 간의 완벽한 격리에 있습니다.
이처럼 대상과 인식 주체가 구별, 격리되어 있는 경우에는 시종 양자의 차이점만이 발견되고 부각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상을 관찰하면 할수록 자기와는 점점 더 다른 무엇으로 나타나고, 가가이 접근하면 할수록 더욱더 멀어질 뿐입니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대상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자기 자신마저 상실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문화인류학이 식민주의의 첨병으로서 세계의 수많은 민족을 대상화하여 그들의 민속과 전통문화 그리고 그들의 정직한 인간적 삶을, 자기들의 그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들의 침탈을 다른 이름으로 은폐할 목적으로, 야만시하고 왜곡해왔으며, 그러한 부당한 왜곡이 결국은 대상의 상실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양심을 상실케 함으로써 그토록 잔혹한 침략의 세기를 연출해내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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