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샘의 잡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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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필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신영복] 21

잡테리어 목공샘 2018. 4. 1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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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근탕과 춘향가
아버님께

젊은이들은 환풍호우하는 사명대사의 도술이 사라져버리자 조금은 서운한 눈치입니다만 사명당에 얽힌 갖가지 도술과 일화들은, 한 시대의 복판을 사심없이 앞장서 간 위인에게 민중들이 바치는 애정의 헌사라는 점에서 도리어 '민중적 진실'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순전히 풀뿌리와 열매와 나무껍질로 된 천연생약이라 글로써 읽는 것만으로도 신선한 느낌이 듭니다. 광고의 홍수와 더불어 쏟아져나온 수많은 합성약품으로 할퀴어진 심신에 상쾌한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같습니다.

외국어의 구문화 표현으로 이도저도 아닌 국적 불명의 문장이 되어버린 오늘의 글을 합성약품에 비긴다면 옛되고 무구한 우리 고유의 글월이 본래의 자태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 전주 목판의 슈졀가는 그 훈훈하기가 바로 갈근탕의 격조입니다.
광고와 외래어의 범람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는 '징역의 격리'는 땟국 씻어내고 우리 글 본디의 광택을 되찾는 데에도 마침 다행한 장소이기도 하겠다 싶습니다.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전문)
계수님께

자기의 그릇이 아니고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여우와 두루미의 우화처럼, 성장환경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자기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대화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언어란 미리 정해진 약속이고 공기여서 제 마음대로 뜻을 담아 쓸 수가 없지만 같은 그릇도 어떤 집에서는 밥그릇으로 쓰이고 어떤 집에서는 국그릇으로 샤용되듯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성장과정과 경험세계가 판이한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 맨 먼저 부딧치는 곤란의 하나가 이 언어의 차이입니다.
같은 단어를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그런대로 작은 차이이고, 여러 단어의 조합에 의한 판단형식의 차이는 그것의 내용을 이루는 생각의 차이를 확대한다는 점에서 매우 큰 것이라 하겠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예를 든다면 아마 '책가방 끈이 길고 먹물이 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간의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전자는 대체로 벽돌을 쌓듯 정제되고 계산된 언어와 논리를 구사하되 필요 이상의 복잡한 표현과 미시적 사고로 말미암아 자기가 쳐놓은 의미망에 갇혀 헤어나지 못합니다. 도깨비이기는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파란색 도깨비와 노란색 도깨비를 구별하느라 수고롭습니다. 이에 비하여 후자의 그것은 구체적이고 그릇이 커서 손으로 만지듯 확실하고 시원시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단순화와 무리, 그리고 감정의 범람이 심하여 수염과 눈썹을 구별치 않고,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리는 단색적 사고를 면치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십수년의 징역을 살아오는 동안 이 두 가지의 상반된 경향의 틈새에서 여러 형태의 방황과 시행착오를 경험해왔음이 사실입니다. 복잡한 표현과 관념적 사고를 내심 즐기며, 그것이 상위의 것이라 여기던 오만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조야한 비어를 배우고 주워섬김으로써 마치 군중관점을 얻은 듯, 자신의 관념성을 개조한 듯 착각하던 시절도 있엇습니다. 뿐만 아니라 양쪽을 절충하여 '중간은 정당하다'는 논리 속에 한동안 안주하다가 중간은 '가공의 자리'이며 방관이며, 기회주의이며, 다른 형태의 방황임을 소스라쳐 깨닫고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떠나던 기억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개인이 자기의 언어를 얻고, 자기의 작풍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랜 방황과 표류의 역정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방황 그 자체가 이것을 성취시켜 주는 것이 아니며, 방황의 길이가 성취의 높이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어딘가의 '땅'에 자신을 세우고 뿌리내림으로써 비로소 이룩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교도소는 대지도 벌판도 아닙니다. 휘달리는 산맥도 없고 큰 마음으로 누운 유유한 강물도 없는 차라리 15척 벽돌 벼랑으로 둘린 외따른 섬이라 불립니다. 징역 사는 사람들이 겪는 정신적 방황은 대개가 이처럼 땅이 없다는 외로운 생각에 연유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들과는 달리, 아무렇게나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가면 그만인 곳으로 여기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고달픈 처지에 심신이 부대끼느라 이곳에 자라고 있는 무성한 풀들을 보지 못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름도 없는 풀들이 모이고 모여 밭을 이루고 밟힌 잡초들이 서로 몸 비비며 살아가는 그 조용한 아우성을 듣지 못하는 생각입니다.
초상지풍초필언 수지풍중초부립.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잎마다 발 밑에 한 줌씩의 따뜻한 땅의 체온을 쌓아놓고 있습니다. 나는 이 무성한 잡초 속에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 몸 기대며 어깨를 짜며 꾸준히 박토를 배우고, 나의 언어를 얻고, 나의 방황을 끝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폭설이 내린 이듬해 봄의 잎사귀가 더 푸른 법이라는데 이번 겨울은 추위도 눈도 없는 난동이었습니다. 입춘 지나 우수를 앞둔 어제 오늘이, 풍광은 완연 봄인데 아직은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벽 속의 이성과 감정(전문)
형수님께

갇혀 있는 새가 성말라 야위듯이 두루미 속의 술이 삭아서 식초가 되듯이 교도소의 벽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날카롭게 벼리어놓습니다. 징역을 오래 산 사람치고 감정이 날카롭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감정이 폭발할 듯 팽팽하게 켕겨 있을 때 벽은 이성의 편을 들기보다는 언제나 감정의 편에 섭니다. 벽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산화해버리는 거대한 초두루미입니다. 장기수들이 벽을 무서워하는 이유이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벽의 기능은 우선 그 속의 것을 한정하는 데 있습니다. 시야를 한정하고, 수족을 한정하고 사고를 한정합니다. 한정한다는 것은 작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넓이는 좁아지고 길이는 짧아져서 공간이든 시간이든 사람이든 결국 한 개의 점으로 수렴케 항ㅇㅇ여 지극히 단편적이고 충동적이고 비논리적인 편향을 띠게 합니다. 징역 사는 사람들의 첨예한 감정은 이러한 편향성이 축적, 강화됨으로써 망가져버린 상태의 감정입니다. 망가져버린 상태의 감정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관계되어야 할 대립물로서의 이성과의 연동성이 파괴되고 오로지 감정이라는 외바퀴로 굴러가는 지극히 불안한 분거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 짝을 얻지 못한 불구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망가진 상태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더욱 복잡하다는 사실입니다. 우연히 시계를 떨어뜨려 복잡한 부속이 망가져버렸다면 시계의 망가진 상태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복잡하다는 명제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벽으로 인하여 망가진 감정을 너무나 단순하게 처리하려 드는 것을 봅니다. 감정을 이성과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이성에 의하여 감정을 억제하도록 하는, 이를데면 이성이라는 포승으로 감정을 묶어버리려는 시도를 종종 목격합니다.
이것은 대립물로서의 이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잘못 파악함으로써 야기된 오류입니다. 감정과 이성은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크기가 같아야 하는 두 개의 바퀴입니다. 낮은 이성에는 낮은 감정이, 높은 이성에는 높은 감정이 관계되는 것입니다. 일견 이성에 의하여 감정이 극복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경우도 실은 이성으로써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높이에 상응하는 높은 단계의 감정에 의하여 낮은 단계의 감정이 극복되고 있을 따름이라 합니다.
감정을 극복하는 것은 최종적으로는 역시 감정이라는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뜻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이성의 계발입니다. 그리고 이성은 감정에 기초하고, 감정에 의존하여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노력은 벽의 속박과 한정과 단절로부터 감정을 해방하는 과제와 직결됩니다.
그러면, 절박하고 적나라한 징역현장에서 이성의 계발이란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띠며, 비정한 벽 속으로부터 감정을 해방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행위를 뜻하는가. 지극히 당연한 의문에 부딪칩니다. 아마 우리는 이러한 추상적 연역에 앞서 이미 오랜 징역 경험을 통하여 그 해답을 귀납해두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 해답이란 언젠가 말씀드렸듯이 한마디로 말해서 징역 속에는 풍부한 역사와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견고한 벽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각양의 세태, 각색의 사건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현존하는 모든 고통과 가난과 갈등을 인정하도록 하며, 그 해결에 대한 일체의 환상와 기만을 거부케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자유, 즉 이성을 얻게 해줍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가슴들은 그 완급, 곡직, 광협, 방원으로 하여 우리를 다른 수많은 가슴들과 부딪치게 함으로써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칩거하고 있는 감정도 수많은 총중의 한 낱에 불과하다는 개안을 얻게 하고 그 협착한 갑각을 벗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사건에 매물되거나 각자의 감정에 칩거해 들어가는 대신 우리들의 풍부한 이웃에 충실해갈 때 비로소 벽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바다가 하늘을 비추어 그 푸름을 얻고, 세류를 마다하지 않아 그 넓음을 이룬 이치가 이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산사신설이 냉기를 발하던 1,2월 달력을 뜯어내니 복사꽃 환한 3,4월 달력의 도림이 앞당겨 봄을 보여줍니다. 반갑지 않은 여름 더위나 겨울 추위가 바깥보다 먼저 교도소에 찾아오는 데 비하여 봄은 좀체로 교도소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습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언덕과 산자락에는 벌써 포근히 봄볕 고여 있는데도  담장이 높아선가 벽이 두꺼워선가 교도소의 봄은 더디고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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